노래되지 않는 나무

화살나무(2)화살나무를 읽다

by 김트리
출처 : https://www.forest-akita.jp/data/2017-jumoku/114-nishikigi/nishikigi.html

*화살나무(1)에서 이어짐


화살나무는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무는 아닙니다. 단풍나무처럼 이름만으로 계절을 불러오지도 않고, 소나무처럼 민족이나 정신을 상징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나무는 동아시아와 서양의 언어 속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스며들어 왔습니다. 그 차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화살나무보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인식해 온 방식을 더 또렷하게 보게 됩니다.


일본의 고전 시가에서 화살나무는 ‘니시키기(錦木)’로 불립니다. 비단나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화살나무의 가을 잎을 떠올리게 합니다. 붉게 물든 잎이 비단처럼 빛난다는 감각, 색채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이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錦木は 立てながらこそ 朽ちにけれ
今日細布 胸合はじとや
(『後拾遺和歌集』, 能因法師)
화살나무는 세워 둔 채로 결국 썩어 버렸구나.
오늘은 고운 베를 맞대어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おもひかね けふたてそむる にしきぎの
ちつかもまたて あふよしもかな
(『詞花和歌集』, 大倉卿 匡房)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오늘 다시 세워 보는 화살나무여,
천 번을 세운다 해도
만날 길은 있을까.

일본 고전 와카에서 니시키기는 식물 이름이면서 동시에 구혼의 표식이었습니다. 사랑을 전하고 싶은 남자가 여인의 집 문 앞에 나뭇가지를 세워 두는 풍습이 있었고, 그 나뭇가지를 니시키기라 불렀습니다. 이 시들에서 화살나무는 단풍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색채와 계절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대신 ‘세워진 채로 남아 있는 시간’이 전면에 나섭니다. 비단나무라는 이름은 여기서 ‘기다림’, ‘썩음’, ‘버팀’이라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문 앞에 세워진 채 대답을 받지 못하고 서서 썩어 가는 나뭇가지. 일본 문학에서 화살나무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 사랑의 성패를 끝까지 떠받치는 물건으로 읽힙니다. 화살나무는 감정을 해결하지도, 방향을 바꾸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남아 시간을 받아냅니다.

이 점은 화살나무의 생태와 기묘하게 겹칩니다. 줄기에 날개를 달고도 이동하지 않는 나무, 굵어지기보다 외곽을 넓혀 같은 자리에 오래 서 있는 나무. 일본 고전 시가에서 니시키기는 이미 기다림의 구조물로 읽히고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사랑을 성취시키지 않지만, 사랑이 실패하는 시간을 끝까지 떠받칩니다.

其茎有三羽,状如箭羽。
(『本草经集注』, 陶弘景)

그 줄기에는 세 개의 날개가 있는데, 그 모양이 화살의 깃과 같다.

중국으로 가면, 화살나무는 전혀 다른 이름을 얻습니다. ‘귀전우(鬼箭羽)’, 귀신의 화살깃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잎의 색을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줄기에 돋은 날개, 화살의 깃처럼 생긴 익상 돌출부를 정확히 붙잡습니다. 중국의 본초 문헌에서 화살나무는 약재로 기록되며, 이런 형태적 설명이 반복됩니다. 여기에는 비유보다 관찰이 앞섭니다. 귀전우라는 이름은 문학적 상징이라기보다, 형태를 그대로 언어로 옮긴 기록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중국의 자연 인식은 오랫동안 본초학과 같은 실용적·관찰 중심의 학문 전통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화살나무는 아름다운 풍경이기 전에, 몸의 구조와 쓰임이 먼저 이해된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시어로 노래되기보다는, 이름 자체에 충분한 설명을 담은 채 남습니다. 중국에서 화살나무는 이미 설명된 존재였기 때문에, 굳이 다시 노래할 필요가 없었던 나무였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자생종인 화살나무는 19세기 후반 이후 영미권과 유럽의 정원 문화로 옮겨 갑니다. 미국에서는 1860년대 무렵 원예용으로 소개되어 널리 퍼졌고, ‘버닝 부시(burning bush)’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조경 소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단풍이 붉게 물드는 외형적 매력과 관리의 용이성은 이 나무를 도시 조경과 정원 식재의 흐름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습니다.

“And the angel of the Lord appeared unto him in a flame of fire out of the midst of a bush:
and he looked, and, behold, the bush burned with fire, and the bush was not consumed.”
— Exodus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었으나 그 떨기나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성서적 이미지는 화살나무의 생태와 묘하게 포개집니다. 타오르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 불처럼 보이지만 재가 되지 않는 것. 서양에서 화살나무는 하나의 고정된 시어라기보다, 이런 은유의 갈래 속으로 흩어집니다.

“Her father’s euonymus shines as we walk…”
— John Betjeman, A Subaltern’s Love Song
“우리가 걸어갈 때,
그녀의 아버지 집에 있는 화살나무가 빛난다…”

여기서 화살나무는 상징의 중심이기보다는 풍경의 일부로 등장합니다. 불, 시간, 감정 같은 다른 것들을 비추는 표면으로 기능합니다.

“箭木,可為箭幹。”
(『산림경제』, 홍만선)
화살나무는 화살의 대를 만들 수 있다.

한국으로 오면, 상황은 또 달라집니다. 화살나무는 감상의 대상이라기보다 용도의 언어로 등장합니다. 이름 자체가 이미 기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국 문학에서 화살나무는 거의 호명되지 않습니다. 단풍은 수없이 등장하지만, 화살나무는 특정되지 않습니다. 이는 화살나무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굳이 종을 나누어 부를 필요가 없었던 인식 구조 때문일 것입니다. 자연은 종의 목록이 아니라, 계절과 풍경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화살나무는 따로 불리지 않았지만, 숲과 가을 속에 함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를 놓고 보면, 우리는 하나의 나무를 두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 왔습니다. 비단, 화살깃, 불, 기능, 혹은 아예 이름 없음. 이 차이는 문화의 우열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쉽게 한 가지 감각에 기대어 자연을 이해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어떤 곳에서는 색에, 어떤 곳에서는 형태에, 어떤 곳에서는 은유에, 어떤 곳에서는 실용에 기대었습니다.

문제는 이 인식이 점점 종 중심의 분석으로 굳어졌을 때 발생합니다. 이름을 붙이고, 종을 나누고, 특징을 정리하는 일은 분명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을 관계망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단위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환경영향평가에서 특정 종이 확인되면 다른 곳에 대체서식지를 만들면 된다는 발상은 그 극단적인 결과입니다. 화살나무를 옮기면 화살나무의 삶도 함께 옮겨진다고 믿는 사고입니다.

하지만 화살나무는 언제나 홀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나무는 숲 가장자리의 토양, 미생물, 곤충, 바람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줄기의 날개는 그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고, 잎의 붉음도 그 맥락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종을 중심으로 한 인식은 이해를 돕는 도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을 쪼개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한국 문학에서 화살나무가 따로 불리지 않았던 사실은 윤리의 증거라기보다,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거리감일지도 모릅니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더 나았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연을 종 단위로 소유하려는 사고가 아직 전면화되기 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화살나무를 둘러싼 문학적 이름들은 결국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이 나무를 통해 자연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방식을 드러내 왔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일일 것입니다. 화살나무를 하나의 종으로 분석하기 전에, 하나의 숲 속에서 다른 생명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다시 놓아보는 일. 그것이 이 나무가 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살나무(3)으로 이어짐


⬛ 인용 작가·문헌
능인법사(能因法師, ?–?)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와카 시인.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에 수록된 노래에서 니시키기(錦木)를 기다림과 부재의 시간을 떠받치는 물건으로 그렸다. 식물의 아름다움보다, 세워진 채 썩어 가는 시간에 주목한다.
오쿠라쿄 마사후사(大倉卿 匡房, 1041–1111)
헤이안 후기의 귀족이자 문인. 『사가화가집(詞花和歌集)』에 실린 니시키기 노래에서, 반복되는 구혼과 실패를 움직이지 않는 나뭇가지에 겹쳐 놓았다. 화살나무는 감정의 매개가 아니라, 감정이 소진되는 시간을 견디는 구조물이다.
도홍경(陶弘景, 456–536)
중국 남북조 시대의 도교 사상가이자 본초학자.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에서 화살나무를 ‘귀전우(鬼箭羽)’로 기록하며, 줄기의 익상 돌출부를 화살깃에 비유해 형태를 정확히 묘사했다. 상징보다 관찰이 앞선 기록이다.
본초경집주
중국 본초학의 핵심 문헌 중 하나. 식물을 풍경이나 상징이 아니라, 형태·효능·구조의 대상으로 다룬다. 화살나무는 이미 ‘설명된 존재’로 등장한다.
성서(출애굽기 3:2)
불타지만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화살나무 자체를 지칭하지는 않지만, 서양에서 화살나무가 ‘버닝 부시’로 불리며 불·지속·소멸되지 않음의 은유와 겹쳐 읽히는 문화적 배경을 이룬다.
존 베트저먼(John Betjeman, 1906–1984)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 「A Subaltern’s Love Song」에서 유오니무스(Euonymus, 화살나무)를 풍경의 일부로 배치한다. 상징의 중심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을 비추는 배경으로 기능한다.
홍만선(洪萬選, 1643–1715)
조선 후기의 실학자. 『산림경제』에서 화살나무를 “화살의 대를 만들 수 있는 나무”로 기록한다. 한국에서 화살나무는 감상의 대상이기보다 용도와 기능의 언어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산림경제
조선 후기의 농서·생활백과. 자연을 종의 미학보다 쓰임과 관계 속에서 다룬다. 화살나무는 이름만으로 이미 충분한 설명을 갖는 존재다.



<화살나무>

제1부 경계에 산다

제2부 화살나무를 읽다

제3부 도시가 선택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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