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1) 기주식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본 팽나무
기주식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묻게 된다.
이 나무는 무엇을 키우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지키지 않고 있는가.
나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날개부터 떠올린다. 색과 무늬, 봄의 이미지. 그러나 나비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시선은 곧 아래로 떨어진다. 알이 놓이는 자리, 애벌레가 갉아먹는 잎, 번데기가 매달리는 가지. 나비의 세계는 날개보다 먼저 잎에서 시작된다. 이때 등장하는 단어가 ‘기주식물(寄主植物)’이다.
기주식물은 먹이식물과 다르다. 먹이식물은 선택지 중 하나일 수 있지만, 기주식물은 대체 불가능한 조건이다. 어떤 나비는 특정 식물이 없으면 태어날 수 없다. 성충은 꽃에서 꿀을 빨 수 있지만, 애벌레는 다른 잎을 먹지 않는다. 생태학에서 기주식물의 상실은 서식지 감소가 아니라, 생활사(life cycle) 자체의 붕괴로 이해된다.
애벌레가 다른 잎을 먹지 않는 이유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진화(coevolution)의 결과다. 대부분의 나비류는 유충 단계에서 특정 식물군에 강한 숙주 특이성(host specificity)을 보인다. 애벌레의 소화 효소 체계, 해독 효소, 장내 미생물 구성은 오랜 시간에 걸쳐 특정 식물의 2차 대사산물(secondary metabolites)에 맞춰 조정돼 왔다. 팽나무 잎에 포함된 화학 성분은 어떤 곤충에게는 독이지만, 팽나무를 기주로 삼아온 나비에게는 성장 신호이자 방어 체계의 일부가 된다.
이 때문에 기주식물은 단순한 먹이원이 아니다. 기주식물은 산란 자극(oviposition cue)을 제공하고, 애벌레의 초기 생존율(early instar survival)과 발육 속도(developmental rate)를 결정하며, 최종적으로는 개체군의 재생산 성공률(reproductive success)을 좌우한다. 성충이 꿀을 빨 수 있는 식물은 여럿 있을 수 있지만, 알을 낳고 세대를 잇게 하는 식물은 극히 제한된다. 기주식물의 부재는 곧 그 종의 국지적 절멸(local extinction)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대체’라는 선택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팽나무는 바로 그 조건의 자리에 서 있는 나무다.
한국에서 여러 종의 나비—알락나비류, 흑백알락나비, 홍점알락나비—의 애벌레는 팽나무와 그 가까운 친척들의 잎에서만 자란다. 도시든, 하천변이든, 마을 어귀든 팽나무가 있는 곳에는 대개 나비의 다음 세대가 준비돼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거의 보지 못한다. 애벌레는 잎의 뒷면에 숨어 있고, 번데기는 줄기와 배경색을 닮아 사라진다. 나비가 눈에 띄는 것은 늘 마지막 장면뿐이다.
기주식물이라는 개념은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 체계를 뒤집는다. 우리는 생물을 종종 ‘개체’로 생각한다. 이 나비 한 마리, 저 새 한 마리. 그러나 기주식물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관계의 단위로만 존재한다. 팽나무가 없으면 나비가 없고, 나비가 없으면 그 나비를 먹는 새와 곤충도 사라진다. 한 그루의 나무가 하나의 개체군을 키우는 셈이다.
이때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기주식물은 누가 보호하는가?
우리는 보호종 목록을 만든다. 멸종위기종, 천연기념물. 대개 보호의 기준은 눈에 띄는 생명이며, 성체 단계의 개체다. 그러나 기주식물은 보호의 언어에서 자주 빠진다. 나비는 보호하면서, 나비가 태어나는 나무는 ‘대체 가능한 조경수’로 취급된다. 팽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고 “다른 나무를 심겠다”고 말하는 순간, 그 나비의 다음 세대는 사라진다. 기주식물의 세계에서 ‘대체 식재’는 개념적으로도, 실증적으로도 거의 성립하지 않는다.
이 모순은 도시에서 특히 선명하다. 도시 생태계는 파편화돼 있다. 공원 하나, 가로수 한 줄, 학교 담장 옆 몇 그루의 나무가 전부인 경우가 많다. 이런 공간에서 팽나무 한 그루는 숲의 축소판이 된다. 그 나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비의 삶도 이어진다. 나무가 사라지는 순간, 연결은 끊어진다. 도시의 생물다양성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단계에서 먼저 무너진다.
그러나 반대로, 기주식물인 팽나무를 심는다고 해서 나비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서울에는 지난 십수 년간 가로수와 공원, 아파트 단지에 팽나무가 대량으로 식재돼 왔다. 내공해성, 내건성, 뿌리 발달 특성 덕분에 도시 환경에 적합한 수종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분명해진다. 팽나무가 늘어난 만큼, 그 나무를 기주로 삼는 나비들도 함께 늘어났는가.
현재까지의 관찰과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답은 대체로 ‘아니오’에 가깝다. 그 이유는 나무의 존재만으로는 기주식물의 기능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도시의 팽나무는 대부분 공간적으로 고립된 개체(isolated individuals)다. 나비의 개체군을 유지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기주식물 밀도(host plant density)와 패치 연결성(patch connectivity)이 필요하지만, 가로수 한 줄이나 공원 내 산발적 식재는 이를 충족하지 못한다.
둘째, 도시 관리 과정에서 반복되는 강전정, 낙엽 제거, 살충제 사용은 애벌레의 초기 발육 단계에서 치명적인 사망률을 유발한다. 나무는 살아남지만, 나비의 세대는 그 자리에서 끊긴다.
셋째, 도시 열섬 현상과 토양 다짐은 팽나무의 생존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애벌레의 발육 시기(phenology)와 잎의 영양·화학 조성을 미세하게 변화시켜 기주로서의 질을 저하시킨다.
결과적으로 서울에 팽나무는 늘었지만, 팽나무를 중심으로 형성돼야 할 곤충–식물 상호작용망(interaction web)은 복원되지 않았다. 이는 도시 생태계가 ‘종의 수’를 늘리는 방식만으로는 회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팽나무는 우연히 나비를 키우는 나무가 아니다. 잎의 질감, 화학 성분, 잎이 나는 시기와 애벌레의 부화 시점은 오랜 시간 맞물려 진화해 왔다. 이 관계는 느리고, 보수적이며,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팽나무를 잃는다는 것은 단지 나무 한 그루를 잃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잃는 일이다.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생태적 합의가 한 번의 공사로 무효화된다.
여기서 기주식물이라는 단어는 정치적이 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비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기주식물을 지키지 않는 사회는, 결과만 소비하는 사회다. 날아오르는 순간만을 사랑하고, 그 이전의 시간을 외면한다. 팽나무는 그 외면의 결과를 묵묵히 떠안아 온 나무다.
나는 팽나무를 ‘강인한 나무’로 그리고 싶지 않다. 팽나무는 강해서 나비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이다. 도로 옆에서, 포장된 땅에서, 바닷바람과 매연 속에서. 팽나무가 남아 있던 자리마다, 나비의 생은 조용히 이어졌다.
용어 정리 | 팽나무와 나비
기주식물(host plant)
특정 곤충의 산란과 유충 발육에 필수적인 식물
먹이식물(food plant)
성충이나 유충이 섭식할 수 있는 식물 전반
공진화(coevolution)
두 종 이상이 상호작용하며 서로의 진화 방향에 영향을 주는 과정
숙주 특이성(host specificity)
특정 생물이 제한된 숙주(식물)에만 의존하는 성향
2차 대사산물(secondary metabolites)
식물이 방어·신호 목적으로 생산하는 화학 물질
산란 자극(oviposition cue)
곤충이 알을 낳도록 유도하는 화학·물리적 신호
생활사(life cycle)
알–유충–번데기–성충으로 이어지는 생물의 전체 생애 과정
국지적 절멸(local extinction)
특정 지역에서 개체군이 사라지는 현상
패치 연결성(patch connectivity)
서식지 조각들 사이의 이동·연결 가능성
발육 시기(phenology)
계절 변화에 따른 생물의 생장·번식 시점
상호작용망(interaction web)
생태계 내 종들 사이의 먹이·번식·의존 관계의 그물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