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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기반성 Oct 22. 2023

소통, 관계의 무게

너도 사회 속에 있지만, 그 무게를 알아차리기에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E성향과 웃상으로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E형 남편을 만나, E형 두 딸들도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감에 있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부끄러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모두 칭찬하는 사회성이 뛰어난 아이라는 평가를 하면 주저 없이 엄마아빠도 끄덕끄덕이 나오니 99% 그런 성향인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첫인상, 첫 만남이 시작이지 다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쉽다거나 잘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40살에 접어들며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지 않는다는 걸 40살이 지나 알게 되었다. 늘 사람들이 좋아서 대학생 때까지 모임도 많이 참여하고 약속도 많았는데 능력에 부치는 회사일들을 해내느라 사실 다른 사람의 관계 맺음에 시간이나 감정을 쏟을 여유가 내 안에 전혀 없었던 케이스였다.


그리고 나는 시험운이 따라주는 편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는 좋은 학교, 좋은 회사에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좀 모자란 능력을 성실함으로 채우려 많이 애를 써왔고 힘이 들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출석, 출퇴근에 있어서 올 개근이었고 아파도 학교, 회사에서 쓰러져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잘하고 싶은 욕심으로 어쩔 땐 후회스러운 행동을 할 때도 있었고 인간관계에서도 미성숙한 순간들이 있었다. 인간관계를 맺고 가까워져서 소통하고 싶지만, 나랑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처받기도 했었다. 지금 첫째 딸도 학교에서 친한 3명의 여자친구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3학년 여학생들 간 누가 누구랑 더 친하고 누가 비밀이야기를 나에게 해줬고, 나랑 더 가까웠으면 하는 친구를 다른 친구가 베스트프렌드라고 하는 상황에 많이 속상해하고 서로 다투기도 한다.

여고를 나온 나는 너무 이해한다. 홀수로 친한 친구들끼리 한 명이 소외되는 그 순간, 감정이 미성숙하고 풍부한 그 시기엔 어떤 마음이 들지.


그리고 이 또한 배워가는 과정이겠지. 내가 원하는 것과 그것을 주지 않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단념하고 내가 다뤄내야 하는 내 감정들이 꽤 버겁다는 것을. 그런 감정들을 10살 아이의 단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10살 아이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싱가포르 학교들은 학부모들을 가끔 부르는 편인데. 이번에 여자친구 3명이 반 분위기를 주도하는 편인데, 이 3명이 자주 다툼을 일으켜서 각 부모들을 불러 상황을 알리고 당분간 3명의 친구들을 분리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일이길래 부모를 학교로 부르는 것인지 우려가 있었는데, 첫째 딸에게 들은 바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학교로 불러 당황했었다. 첫째 딸 학교의 한국 담당 선생님께서 말하기를 싱가포르는 딱딱한 편이라 조금이라도 튀는 아이를 제지하려는 성향이 크다. 적극성과 자유로움을 타고난 한국 학생의 경우 리더십이 있는 반면 튀는 행동을 하는 아이로 다른 얌전한(?), 말을 잘 따르는 친구들에게 영향이 갈까 단속을 기울이는 편이라고 말해주셨다. 학교에 상주하시면서 한국 학생들을 관리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 아이의 성향이나 생활을 부모보다 더 가까이 보고 계시는데 큰 따님은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핵심 멤버고 교우관계나 사회성이 뛰어나다고 말해주셔서 조금 안심했다.


사회란, 너무나 다행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 '다양한'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을 만큼 모든 사람들이 다른 성향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성이 중요하긴 하나 사회성이 좋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 등 사회성이 뛰어나 다해서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관계를 맺고 지내왔음에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 아닌, 40살이 된 내가 다른 나라로 이주를 하면서 불필요한 관계가 자연스레 끊어지고 고독함을 느끼는 건 허무함이라 표현을 해야 할까. 내가 20,30대 생각해 오던 나름의 관계를 위한 노력과 소통이 어떤 결과를 위함이었던 것은 아닐 텐데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두고 과거엔 그랬지로 묻어야 한다는 게 많이 아쉽다.

고독 속에 나에게 던진 질문의 답으로 '언젠가 각자 인생을 열심히 살다가 또 다른 인연으로 만났을 때 그동안의 노력이 더 큰 반가움으로 찾아오겠지, 그런 순간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로 정리되었다.


오늘도 첫째 딸은 주말인데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았다. 그 3명의 여자친구 말고도 딸은 남자친구들이 꽤 많고 매주 집으로 초대를 받아 플레이데이트를 한다. 킨더 때 워킹맘이고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친구집에서 하는 플레이데이트는 거의 쫓아다녀주질 못했다. 10살인 지금, 더 고학년이 되면 이런 추억을 쌓으래야 쌓을 수 없을 것임을 알기에 웬만하면 적극 보내주는 편이다.

나도, 남편도 어렸을 때 친구들이 많고  친구네 집에서 놀았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잘 놀다 와 큰딸, 대신 저녁식사 전에는 돌아와야 해. 주말은 패밀리 시간이라 우리가 그들의 저녁식사시간을 지켜줘야 한다 당부하고 보낸다.


지금 시간을 즐기고 와 나의 이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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