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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는 소 Feb 23. 2024

30년 세월이 흘렀다.

더 당당하게 앞으로 30년 살아가자!

설명절을 앞두고 대학교 동기의 모친이 돌아가셨다.  오랜만에 동창생들이 상갓집에 모였다. 

"네 아버님 돌아가신 지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아버님 돌아가셔서 너 신입생 OT때 안 왔잖냐!"

옆에 앉은 친구가 나한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고교 졸업 후 재수생활을 한 뒤, 대학에 입학해 신입생 OT에 참여해야 하는데,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친구가 그걸 기억하고 얘기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올해 2월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째 되는 해다. 지금 스무 살이 된 내 아들을 보고 있자니 이 아들 녀석 나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물정 모르는 한없이 어린애 같은데, 이런 스무 살 자식을 두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와 우리 가족이 참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 나이 49세, 한창 일할 시기에 천국으로 가셨으니 아버지의 마음도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러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살아갈까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30년 동안 죽지 않고 잘 살아왔다. 모든 일이 감사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생활환경도 바뀌었고 점차 가치관도 변했다.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바뀌었다. 접하는 사회와 사람이 바뀌니 생각도 변하고 인생도 변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었다고 얘기해 준 친구덕에 지나간 30년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아버지가 옆에 계셨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살아계셨으면 불같은 아버지 성격에 지금껏 그 분과 갈등하고 싸우고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립고 아쉽다. 어렵고 힘들었을 때, 옆에 계셨더라면 의지라도 됐으련만... 기쁜 일이 생기면 얼른 가서 자랑했을 텐데... 우리 아버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내 성적에 맞지도 않고 아는 이도 없는 대학생활이 싫어서 그만두려고 했을 무렵, 바로 옆집에 대학동기가 산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30년이라고 넌지시 얘기한 그 친구다. 그 친구 덕에 대학생활에 정을 붙이고 다른 동기생들도 사귈 수 있었다. 그렇게 알고 지낸 지 30년 된 대학동기생들이 그동안 여러 경조사에서 같이 울고 웃어주었다. 아버지, 장인어른 없는 우리 가정에 우르르 몰려와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 주었다. 모두들 귀한 친구들이다. 


부친의 병환 때문에 일단 아무 대학교라도 입학이나 하라고 하여 잘 알지 못하던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내러 갈 때, 그 대학교를 졸업할 때, 군대에 입대하러 전라남도까지 내려갈 때, 힘든 군생활을 마치고 제대할 때 묵묵히 같이 동행해 준 친구들도 있다. 노량진에서 재수생활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 30년 동안 인생의 굴곡을 같이 걸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돈도 없을 텐데 모르는 길 물어가며 서울에서 지방까지 와주었던 친구들이다. 20대 초반 내 여러 가정사에 함께하다 보니 재수생들의 모임을 30년간 지속한 원동력이 된 건 아닐까? 재수생 친구들을 만나면 나한테 감사하라며 얘기한다. 그땐 힘들었는데, 30년이 지나니까 웃으며 얘기한다.  


부모가 천륜이라면 부부는 인연이던가. 아버지는 20년간 옆에 있었지만, 아내는 30년간 옆에 있어 주고 있다. 친구로 있다가 결혼한 지 22년이 되었으니 아내와의 인연이 아버지와의 천륜보다 오래된 셈이다. 이제 어머니가 해준 음식보다 아내의 음식이 더욱 맛있고 입에 맞는다. 결혼할 때 아내와 내가 모두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양가 어른들 자리에 어머니들만 앉아 계셨다. 아버지 생각나는 게 나 혼자였을까?  세상의 아버님들이여. 건강관리, 몸관리 잘하면서 평안히 살아가시길~


대학졸업 직후, IMF 금융위기로 취업도 안되고 군대도 가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지로 3년간의 군대 장교복무를 선택했고 특전사 장교로 잘 복무하고 제대했다.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할 때, 자랑스럽게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때, 아버지가 옆에 계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아내는 3명의 아이들을 출산할 때마다 장모님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나는 장교 임관식과 제대할 때, 아버지한테 경례를 하고 싶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만난다면, 그때 꼭 아버지한테 경례하고 싶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30년간 서울에 내 집마련도 했다. 혼자된 어머님을 모시면서 남의 집에서 눈치 보고 싶지 않았고 결혼생활을 남의 집에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군복무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고 장모님도 자기 딸이 전셋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결혼하면서 기존 어머니와 살던 전셋집을 처분하고 내가 모은 돈과 아내가 모은 돈을 합쳐 서울 외곽지역에 오래된 아파트 17평을 샀다. 아내랑 둘이 열심히 살았다. 몇 번 이사한 뒤로 지금은 1군 건설사 아파트에 자리 잡고 어머니 모시면서 잘 살고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떻게 살아가야 싶었는데,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이게 인생인가 보다. 


남자들은 아버지 생각이 날 때가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때와 고정적인 일자리를 얻어 취업할 때, 그리고 결혼하면서 가정을 꾸릴 때 아버지가 생각나는 듯하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인터내셔날 NGO에 활동가로 취업하여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나눔 활동을 펼치는 동안, 아버지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목회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며 미래세대인 청년들을 항상 챙겼던 아버지였다. 국내외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하며 모금활동을 하고 예비 사회복지사를 키우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면서 아버지의 유훈을 수행해 내는 것 같이 몸이 힘든 줄 몰랐다. 소외된 사람들과 교회 성도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소외된 이웃들과 내가 속한 기관의 직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내 모습을 아버지가 기뻐하셨을 것이다. 귀한 직장에서 헌신하며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귀한 동료들도 만나고 급여까지 받을 수 있으니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30년간 세 명의 자식들도 생겼다. 혼자된 어머니가 금이야 옥이야 본인 품에 안고서 세 아이 모두 잘 키워 주셨다.  아프지 않고 다들 잘 컸으니 그걸로 되었다. 첫째는 이제 성인이 되었고 둘째와 막내도 4년 뒤엔 모두 성인이 된다. 각자 꿈을 갖고 이 세상의 올바른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지지해 주면 될 일이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의 인성을 품고 키운 아이들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막내아들의 자식들을 세상 그 무엇보다 이뻐해 주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축복 속에 다들 잘 성장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이집트)의 압제에서 벗어나 모세를 따라 대이동을 한 뒤, 지도자였던 모세가 죽었을 때 홀로 남은 여호수아는 얼마나 힘들고 당황스러웠을까? 하나님은 외롭고 두렵기도 했을 후임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명령한 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구약성경 여호수아 1장 9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가난에 힘들어 초반에는 매사에 주눅 들고 자신감이 없었다. 기댈 곳 없어 쫄기도 많이 했는데 점차 눈물도 없어지고 당당해졌다. 자립하게 되고 생활력을 갖추면서 성취감도 높여나갔다. 어쨌든 남은 가족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다. 살아보니 결국 살아지더라. 사람들에게 실망했지만 결국 사람들이 도움이었고 희망이었다. 앞으로의 30년도 나쁘지 않게, 더욱 아름답고 소중하게 흘러가리라 믿는다. 20대인 나에게 아쉬움과 서러움을 안겨준 아버지의 사망이 내 아들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내가 건강관리만 잘하면 될 것이다. 쫄거나 기죽을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한 것들도 이것저것 많을 텐데, 그런 것들을 잘 파악하고 이뤄내기도 해야 할 것이다.  


30년 동안 잘 살았으니 앞으로 30년 나날도 풍성하게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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