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좀 더 길게 사용하고 싶은데...
계속되는 폭염날씨에 선풍기도 열을 받은 것일까? 10년 정도 사용한 선풍기가 고장 났다. 거실에서 열심히 바람을 만들어 내던 녀석이 끼익 끼익 몇 번의 신음소리를 내더니만 갑자기 날개가 멈춰버렸다. 전원은 들어오니 메인보드의 문제는 아닌 듯하여 몸체 분리 후 모터에 윤활유도 주입해 보고 콘덴서도 교체해 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제조사에 AS를 문의했더니 상담원이 모델명을 듣고는 고장 증상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선풍기를 10년 정도 사용했으면 오래 사용했으니 그냥 새 제품을 사라고 했다.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 부품이 없다면서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부품이 없다며 친절하고 정중하게 얘기하니 어쩌겠나.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한 여름철에만 사용하는 선풍기지만 매년 거실에서 온 가족이 사용하다 보니 살짝 정이 들었던 터였다. 이제 서로 헤어져야 할 시간인가 보다.
회원제 대형마트에서 10여 년 전에 구입한 이 선풍기의 제조라벨을 살펴보니 미국산이다. 웨스팅하우스라고 몸체에도 로고가 딱 박혀 있는데 미국의 원전기업인 그 웨스팅하우스와 동일기업인지는 모르겠다.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원전사업을 주력으로 하기 전에 가전제품을 만들었다고도 하니 같은 계열사일 수도 있겠다. 천조국 미국에서 10년 쓰고 고장 날 선풍기를 만들어서 팔았지 싶은데... 10년 썼으면 오래오래, 잘 쓴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대야가 발생하는 날이면 거실에 있는 에어컨을 켜고 집의 모든 방문을 열어두고선 가족들이 잠을 청한다. 집에 에어컨이 딱 하나 있는데 이건 국내기업 LG에서 만든 제품이다. 아내가 결혼 전 자기 집에서부터 써오던 에어컨으로 1996년도에 만든 제품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처남이 사용하던 것을 15년 전쯤 우리 집에 가져와서 사용하고 있다. 매년 6월쯤 장마예보가 나오기 시작하면 "이제 에어컨을 새 걸로 바꿔볼까?" 생각도 해보지만,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에어컨을 교체하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 아내도 장모님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이 에어컨을 처분하는데 주저하는 눈치다. 뭐 고장이라도 나거나 바람이 차갑지 않다면야 핑계김에 에어컨을 바꿔볼 텐데, 당최 고장이 안 난다.
가전제품 튼튼하게 만들기로 유명한 이 기업은 존재자체가 고맙긴 한데, 이렇게 해서 돈은 어찌 버나 궁금스럽다.
우리 집에서 1996년산 이 에어컨보다 더 오래된 전자제품이 금성사(LG의 예전 회사명) 선풍기다. 이 선풍기는 1992년 제품으로 내가 고등학생 때 쓰던 제품인데 이사하면서 계속 갖고 다녔다. 여름철에 어머니가 주로 본인 방에서 사용하셨는데 첫째와 둘째 아이들이 이 금성사 선풍기 앞에서 여름을 보내며 어린 시절을 지냈다. 지금은 덜덜거리는 소음덕에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내 서재에서 가끔 더위와 습기를 없애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재작년에 철제망을 감싸는 원형 플라스틱 고정장치가 끊어져서 철제망을 철끈으로 군데군데 묶어 놓았다. 볼품은 없지만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
10년 된 웨스팅하우스의 선풍기가 고장 난 요즘, 30년이 넘은 이 금성사 선풍기가 거실로 나와서 열일하고 있다. 끊어진 플라스틱 고정장치도 글루건으로 다시 붙여놓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쓰시던 이 선풍기와 오랜 정이 듬뿍 들었는데 고장 없이 계속 썼으면 좋겠다.
2025년 이 더운 한낮에 옛 금성사 선풍기를 돌리고 밤에는 LG의 96년산 에어컨을 돌리고 있다.
10년 썼으니 오래 썼다는 웨스팅하우스의 국내수입회사 상담원 말에 조용히 저항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사라진 옛 핸드폰 제조사에서 근무하던 직원한테 들은 말이 있다. 핸드폰 만들 때 2~3년 뒤에 고장 나게 하는 것이 기술력이라고. 그 '기술력'이 있어야 망하지 않는 대기업이 된다고. 대기업에서 대형가전을 만들 때 보통 10년 정도 내구연한을 생각하고 만든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모두 장난 같은 말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 너무 잘 만들어서 고장이 안 나면 기업이 어찌 버티겠냐. 거기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먹고살아야 할 텐데. 과거 탱크주의로 유명했던 대우가 망한 이유는 제품을 너무 튼튼하게 만들어서였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 않았던가!
10년 동안만 잘 돌아가는 선풍기의 미국기업이 기술력 최고일까? 아니면 30년 이상 고장 없는 선풍기의 한국기업이 기술력 최고일까? 집에 들여놓은 전자제품들을 오래 쓰다 보면 가족 같아진다. 추억이 깃드니 유대감도 생기고 정이 든다. 고장 나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제품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기업들도 먹고살아야 하겠지만, 내구연한 좀 더 길게 만들어주시길...
날이 더우니 고장 난 선풍기를 보며 넋두리 한번 털어봤다. 이 더위가 언제쯤 가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