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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환 Nov 27. 2020

꽃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뿌리의 마음가짐

어느 집단이나 조명과 관심을 많이 받는 역할이 있는 반면, 열심히 노력해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는 역할도 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속한 직군은 후자에 가깝다. 나의 일은 그렇게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없으면 큰일이 나는 포지션으로, 그렇다 보니 팀마다 꼭 한 명씩은 둔다. 그런데 그 이상의 충원이나 지원에는 소극적인 경우가 많다. 


회사 전체에서 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오직 나 하나뿐인 것은 꽤 외롭고 힘든 일이다. 그리고 관심을 많이 받으며 인원수도 많은 화려한 역할 군의 동료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을 느낀다. 그 관심과 중요도의 간극을 어떻게든 메워보려 최선을 다해보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숲속에 들어온 사람들이 화려하게 만개한 꽃을 보며 감탄할 때마다, 컴컴한 흙 밑으로 뻗어난 어둠 속의 뿌리가 된 기분으로 그 꽃들을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이 일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숲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며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역할군 에 돈을 지불할 리가 없다. 화려한 업무를 하는 역할군들도 일을 마감하는 과정을 뜯어보면 결국 내가 필요하다. 내가 제대로 영양분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꽃을 피울 수 없다. 그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화려한 역할군의 일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가 성심성의껏 뻗어놓았던 뿌리들을 누군가 모조리 끊어내거나 엉망진창으로 휘감아버리면 몹시 상실감을 느끼며 괴로워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업무조정을 미안해하며 사과하는 동료 분들에게 “괜찮아요. ○○ 업무는 우리 팀의 꽃이니 까요.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여유도 생겼다. 


아무리 영양분을 공급해줘도 결국 꽃을 피워내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에 비하면 내가 공급해준 영양분을 흠뻑 빨아들여 만개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비록 저 꽃이 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저 꽃은 내가 피워낸 꽃이라고 생각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옅어지며 한결 마음이 좋아진다. 나는 아마도 앞으로도 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꽃만 가득한 숲은 숲이 아니니까. 


꽃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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