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갈등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무렵에 심각한 윤리적 갈등을 겪은 경험이 있다. 자정이 넘을 무렵이 되면 항상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가게에 들어오시는 오십 대 아저씨가 한 분 계셨는데, 이분은 항상 냉장고 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낸 다음 계산도 안 하고 바로 따서 꿀꺽꿀꺽 마시면서 걸어와 계산대에 빈 병을 ‘텅!’ 던지듯이 내려놓으시며 “계산해주소” 하고 외치 셨다. 단순 일용직 근무를 하다 보면 이런 무례한 일을 워낙 자주 당하므로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매번 아무 생각 없이 계산만 했었는데, 동네 오지랖 네 트워크라는 것이 워낙 강력한 탓에 지나가는 손님들이 그 아저씨에 대해 혀를 쯧쯧 차면서 한두 마디씩 던지는 정보가 모여서,
- 샷시 설치 일을 하시는 분
- 부인이랑 금슬이 좋기로 소문남
- 몇 주 전 부인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심
- 그 사건 이후로 사람이 완전히 망가짐
- 이십 대 중반의 아들이 있는데 망가진 아버지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님
이 정도까지 그 아저씨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소문에 의해 강제로 학습당함). 그러던 어느 날 저 정보상의 아들이라는 분이 편의점에 찾아왔다. 뭔가 체육 계열을 전공했을 것 같은 우락부락하고 거칠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청년은 아버지가 심각한 알코올중독 증상을 앓고 있으니 절대로 술을 팔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그 아저씨께서 찾아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셨는데, 나는 재빨리 달려가 아저씨를 제지하며 “아드님이 술 팔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체념한 듯이 어깨를 축 늘이고 돌아가시다가 갑자기 문을 나서기 전에 우뚝 멈추셨다. 그리고 손으로 가슴을 퍽퍽 치고 발로 땅을 박차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윽… 큭… 크… 흐으으으……” 하는 탄식과 울음소리가 입을 억지로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 감정의 분출이 너무 강렬 하여 고통이 나한테까지 전해져오는 듯했다. 한참을 몸부림을 치며 쓰러질 듯 흐느끼던 아저씨는 다시 나에게 돌아오셨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부인의 사망 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시며 술이 없으면 정말로 죽을 것 같으니 제발 팔아달라고 사정을 하셨다. 아버지뻘 되시는 분이 내 소매를 붙잡고 사정을 하는 데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저 정도로 심하게 고통 스러워하는 걸 보니 나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날 술을 팔고 말았다. 아저씨는 거듭 “고맙고, 고맙소” 하시며 돌아가셨다. 소주 한 병을 단번에 들이켜시고는 곧바로 안정을 되찾으시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들 되시는 분이 잔뜩 성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당부했는데 왜 술을 팔았느냐고 화를 내길래 나는 너무 힘들어 보이셔서 어쩔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알코올중독자에게 술을 주는 건 죽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면서 역정을 냈고, 맞는 말이기 때문에 나는 면목 없이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내 아르바이트 인생에서 가장 심한 윤리적 갈등을 겪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자정이 되면 어김없이 아저씨가 나를 찾아와 애원하셨고, 그 고통스러운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술을 팔고 나면 아침 해가 뜨자마자 아드님이 찾아와 나에게 욕을 해댔다. 이런 일이 대여섯 번 정도 반복되자 아들 되시는 분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고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분에게 욕을 먹을 때마다 매번 오늘이야말로 술을 팔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아저씨를 보면 그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해 결국 술을 팔고 마는 내가 나도 참 답답했다(하지만 정말이지 그 모습을 보면 술을 드릴 수밖 에 없었다).
그런 일이 열흘쯤 반복되다 아드님이 나를 주먹으로 위협할 때쯤 돼서야 감금을 당하셨는지 아저씨는 더 이상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윤리적 갈등이 끝나게 되었다. 이렇게 쓰고 나니 그냥 팔지 않으면 될 일을 뭐 그렇게 어렵게 만들었나 싶겠지만 그 당시 아저씨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떠 올려보면 10년이 지나 그때보다 성숙한 어른이 된 지금의 나라도 과연 안 팔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