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쳤던 자의 회고
나의 이십 대는 노력가의 성공담을 담은 자기계발서가 서점가를 휩쓸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미덕으로 추앙받던 시기였다. 근성과 노력을 다해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면, 결국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며 도중에 도망치면 패배자가 된다는 것이 뭔가 상식적인 사회적 담론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도 저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딪혀나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실패를 거듭 하다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삶이 망가져버린 사람들이 말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 담론이 마치 종교적 신념처럼 머리와 마음을 고양시켜, 관측되는 결과들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부딪혀나갔다. 이대로 계속 가면 위험 하다는 경고등이 눈 바로 앞에서 번쩍거렸지만 무시 하고 걸어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서 더 무리하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를 것 같은 기로에 서 있었다. 그것은 노력과 끈기 담론으로 정신이 고양된 상태에서도 더 이상 발이 움직여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위험이었다. 그 위기에 머리를 맞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그제야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누군가 살 수 있는 도주로를 열어주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 도주로로 도망을 쳤다. 가던 길을 우직하게 계속 가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망갔기 때문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뒤로 삶의 고난 앞에서 내뺀 도망자라는 부끄러움이 항상 나를 쫓아다녔다. 그 부끄러움이 마음을 위축시켜 사람을 만나는 일을 가급적 피했고,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더라도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런 도망자 생활이 1년 2년 3년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을 다시 돌아봤을 때 조금 놀라고 말았다. 새로 선택한 일이 마음에 들었고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다시 몸과 마음의 건강과 정서적 여유를 되찾은 상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칠 때만 해도 이대로 영영 남은 삶을 패배자로 살게 될 거라고 절망했었는데, 막상 도망치고 보니 이 길은 이 길 나름대로 상당히 괜찮은 길이었다. 아니 오히려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이런 마음 상태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던 과거를 반추해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놀랍게도,
‘아아… 조금만 더 일찍 도망치는 거였는데…’
였다. 1~2년만 더 일찍 도망쳤어도 조금은 더 수월 하고 유리하게 사회의 밀림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정말로 죽을 것 같은 위험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망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도망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도망쳐서 패배자가 되는 것이 무서웠다. 도망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도망을 칠 수 있었고, 세월은 흘러 흘러 포기하지 않는 노력과 끈기 담론도 퇴색하여 더 이상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로 자리 잡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 다시 지나간 날들을 돌아 보면 도망쳤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다. 만약 딱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너는 삶에서 도망친 게 아니라
차선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지금 도망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아무도
너의 발자국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