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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환 Dec 04. 2020

해로운 기억

떠안고 살아갈 수 없는 세월들

샤워를 할 때 가끔씩 ‘으아’ 하고 탄식 섞인 소리를 지를 때가 있다. 샤워 중 유독 괴로운 기억들이 많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실수했던 일, 부끄러웠던 일, 상처 받았던 일 등이 연쇄적으로 떠오르다 감정의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그런 소리를 내버리고 만다. 


충격의 강도가 심할 때는 샤워하던 도중 철푸덕 주저 앉아 버릴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내가 이렇게나 많이 떠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샤워를 할 때마다 이런 기억들이 한번에 호출되는 것도 놀랍지만, 평소 이런 기억들이 억눌려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아마도 내 정신적 방어기제가 이런 기억들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억눌러주고 있는 듯하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사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나가는 것을 보면 동일한 기능이 작동하고 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의 강도와 양은 사실 의식이 감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기억들을 흘려 보내야 한다. 불시에 떠올라 마음의 중심을 공격할 때도 의연하게 흘려 보내야 한다. 


요즘은 샤워를 하다가 이런 기억이 떠오르면 물이 빠지는 하수구를 바라본다.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기억도 함께 흘려 보내는 상상을 한다.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떠오르지만 그럴 때마다 침착하게 하나씩, 하나씩 하수구로 흘려 보내는 상상을 이어간다. 


가슴을 찢는 슬픈 기억도,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수치스러웠던 사건도, 마음을 난도질했던 사람의 목소리도, 원하지 않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의 눈동자도. 


모두 그렇게 흘려 보낸다. 

떠안고 살아갈 수 없는 세월들을 모두, 흘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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