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자체가 목적으로 완결되는 즐거움
얼마 전 창고를 비우면서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메이커를 알 수 없는 조잡한 싸구려 문구류들이 한 번 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잔뜩 들어 있는 박스였다. 그것들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생활고의 극을 달리 던 이십 대 중반 무렵에 내가 모아둔 문구류들이었다.
그 당시 형편이 어렵다 보니 뭔가를 구매하고 싶은 소비 욕구를 전혀 해소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소비 욕구가 쌓일 때마다 문구점에 가서 저렴한 문구 류 한두 개씩을 사 오는 일이 그 당시 꽤 즐거운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때 틈틈이 모아둔 400원짜리, 500원짜리 문구류들이 작은 박스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쌓여서 사용되지도 않은 채 창고 속에 잠들어 있다가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발견된 것이다.
나는 박스를 열자마자 마음이 몹시 힘들고 기분이 나빠졌다.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 당시의 괴로운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쓸 것 같은 지우개랑 샤프심 같은 것들만 몇 개 꺼내고 모두 다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니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을 버리는 게 너무 아까워서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도 선뜻 쏟아 붓지 못했다.
가난의 기억을 버리기 위해 과감하게 처분하기로 결심한 물건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마음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도 안 쓰고 버리게 될 것을 그 당시의 나는 왜 그렇게 기뻐하며 열심히 모았던 걸까 싶어 허무한 서글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렇게 쓰레기통 뚜껑을 연 채로 멍하니 서 있으니, 폐업을 준비하는 문구점에서 800원짜리 샤프를 사 들고 세일 기간에 득템했다며 즐겁고 풍족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나중의 일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적어도 그 당시의 나에게는 그렇게 문구류를 사 모으는 일이 분명 삶의 큰 즐거움이었다. 물건의 사용 여부에 상관없이 구매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으로서 완결되는 그런 즐거움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의 압박이 상당히 느슨해지면서 주저하지 않고 문구류들을 쓰레기통에 쏟아 넣을 수 있었다. 쓰레기 통 뚜껑을 닫을 때는 열었을 때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한 번도 안 쓴 물건들이지만
사실은 이미 충분히 다 쓴 물건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