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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환 Dec 10. 2020

증명사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

물건 찾을 일이 있어서 구석에 방치해두고 오랫동안 쓰지 않고 있었던 서랍장을 열었다가 내 증명사진을 모아둔 비닐 팩을 발견했다. 각각 다른 시기에 찍은 사진들이 서로 뒤섞여 있길래 지그소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나이대 순서에 맞게 배열해보았는데 얼굴의 늙음이 너무 확연하게 차이가 나서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맞춰볼 수 있었다. 


다 맞추고 나서 뿌듯한 보람과 늙어가는 섭섭함을 동시에 느끼던 중 문득 나이대별로 찍은 증명사진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라고 말았다. 모든 사진이 한 결같이 잔뜩 긴장하고 굳어 있는 표정과 경직된 자세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 눈앞에 사진기 를 들이대면 긴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내가 찍은 증명사진들은 그걸 감안하더라도 좀 심하게 굳어 있는 느낌이었다(사진사가 총을 겨누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딱딱한 사진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고, 사진을 그렇게밖에 찍지 못한 과거의 나(들)에게도 실망감이 들어 오늘 외출한 김에 사진관에 들러서 증명사진을 새로 찍기로 결심했다. 사진사님이 안내해주시는 대로 외투를 벗고 조명이 설치된 의자에 앉았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살짝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으니 과거의 나(들)은 왜 고작 이런 게 안 돼서 그렇게 딱딱한 사진들만 남겼을까 싶어 답답하고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카메라를 세팅하시던 사진사님께서 셔터를 누르지 않고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시더니, 고개를 숙이고 목을 돌리고 하는 식의 자세교정을 주문하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이 교정 지시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조금 더 돌려 라, 조금 더 숙여라’ 하는 식의 추가 주문이 들어왔 다. 그렇게 조금씩 계속해서 수정을 당하다 보니 내가 뭔가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위축되고 몸이 긴장되었다. 


그렇게 수차례의 수정 끝에 결국 촬영이 완료되긴 했으나 사진을 받아보니 과거에 찍었던 증명사진들과 영락없이 똑같은 포즈로 찍혀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과거의 나(들)이 어째서 이런 딱딱한 포즈로 찍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면서 화내고 한심하게 생각했던 게 미안해졌다.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지금과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 당해왔던 거겠지. 


지금은 재촬영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추후 몇 년간은 이 사진을 계속 사용할 듯하지만, 다음번에는 자세연구를 하든 찍히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진관을 찾든 해서 좀 더 자연스러운 증명사진을 남겨두고 싶다. 뭐, 죽기 전 에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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