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추억
학창 시절 아주 잠깐 순수 문학도를 꿈꾸며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계문학들을 읽어나가던 때가 있었다. 나는 남고를 나왔었는데 그 당시 어째서인지 책을 읽는 나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매번 공격적인 말을 던지던 아이가 있었다. 그날도 괜히 다가 와서,
“또 책 읽는 척하고 있냐? ㅋㅋ”
하고 감정을 긁고 갔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애의 어깨를 잡아 세워 이걸 한번 읽어보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그 애는 뜬금없이 뭘 보라는 거냐며 거절했지만 나는 건넨 책의 한 페이지를 펼치며 여기 이 부분만이라도 좋으니 한번 읽어보라고 얘기했다.
그때 건넨 책이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었는데 야한 장면 묘사가 꽤 많이 나오는 소설이었고, 내가 펼친 페이지도 그런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그 아이도 몇 문장을 훑어보더니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잠깐 읽어보고 오겠네 친구” 하고 책을 들고 갔다.
그렇게 《지와 사랑》을 읽고 감명을 받은 그 아이는 그 책을 다른 친구들에게 돌리기 시작했고, 평소 책이라고는 전혀 인연도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이
“헤르만 헤세 최고야!”
“세계문학 굉장해!”
“헤르만 헤세 쩐다!”
같은 말을 외치며 순수 문학 작품을 돌려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소위 불량 학생이라 분류되는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는 아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그 아이는 더 이상 책을 읽고 있는 나를 공격하지 않게 되었다(가끔 또 좋은 작품이 있으면 추천해달라는 말은 하고 갔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어떤 내용이냐가 중요할 뿐이지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