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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환 Nov 23. 2020

노동의 기억

그 일은 안해봐서 다행이다

이십 대에 정말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 경험의 부작용 중 하나는 내가 손님으로서 같은 업종 가게에 갔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점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가장 오래 했었는데(1년) 덕분에 편의점의 모든 업무를 세세하게 잘 알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스트레스 받는 것 중 하나는 물품 진열이었다. 선입선출의 원칙에 따라 새로 입고된 제품을 뒤에 배치하는 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진열대에 컵라면 다섯 개가 놓여 있는 상태에서 한 개가 팔려서 네 개가 되었다고 하자. 그래서 유통기한이 최신인 새 컵라면을 보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냥 빈 자리에 새 컵라면을 턱 배치해놓으면 안 된다. 이미 배치되어 있던 컵라면 네 개를 다 빼낸 다음, 새 컵라면을 맨 뒤에 넣고 빼낸 네 개를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유통기한이 많이 남은 제품이 가장 나중에 팔려나갈 수 있도록). 


모든 식품 진열이 이런 규칙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에 이렇게 다 빼고 다시 넣고 하는 작업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 그래서 10년이 넘은 지금도 편의점에 가서 상품 진열을 볼 때마다 그 작업이 자동으로 떠올라 몹시 불편한 마음이 들곤 한다. 이런 식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힘든 노동의 기억은 아르바이트를 해봤던 직종마다 자동으로 탑재되어 그런 업소에 갈 때마다 유령처럼 되살아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커피숍에서는 자동으로 되살아나는 힘든 노동의 기억이 없다. 단골 커피숍에 갈 때마다 사장님이 항상 건프라를 만들면서 놀고 계시는데…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으므로 분명히 스트레스 받는 업무가 많으시겠지만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참 행복하고 여유 있고 좋아 보인다. 그러므로 나도 편안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앉아 있다 올 수 있다. 


이십 대 초중반에 커피숍 아르바이트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꼭 해보고 싶었는데, 커피숍 구인 광고에 항상 빠지지 않고 기재되는 ‘용모 단정’ 항목이 주는 공포와 압력이 심해서 단 한 번도 구직 시도를 해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수년간 아쉽고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 점이 몹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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