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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환 Nov 23. 2020

나만 빼고 저축하는 삶

고정 수입의 축복

이십 대에 프리랜서 글쓰기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 나이대의 젊은이들이 보통 그러하듯 나 역시도 오로지 노력으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자비 없는 폭풍은 예상했던 것보다 수십 배는 혹독했고 마음뿐만 아니라 통장 잔액까지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은 모이지 않고 줄어들기만했다.분명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는데도 애초에 보수가 너무 적거나 그나마도 지급일이 자꾸 늦어졌고 심지어 아예 안 주고 잠적하는 경 우도 많아서 항상 궁핍한 상태가 이어졌다.


1년도 안 되어서 독립할 때 들고 나왔던 초기자금(이라고 할 것도 없는 액수지만 어쨌든)은 다 떨어져 버렸고

초반에 호기롭게 다짐했던 ‘일로 인정받아 꿈을 이루고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겠다’라는 각오도 사라졌다. 당장 먹고살기 위한 생존 활동에 적색등이 켜졌다.


이후로 일을 가리지 않았고 더 닥치는 대로 받았다. 차마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몹시 부끄러운 글을 쓴적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돈은 모이지 않았고 자꾸만 줄어갔다. 그 시점에 어떤 은행에서 투자상품 가입 권유 전화를 받았다. 남아 있는 자금을 저축만 하면 손해니 자신들이 추천하는 투자상품에 가입하여 돈을 굴려 높은 수익을 노려보라고 제안했다. 문득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축이라니? 남은 돈이라니?

이 사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다 세월이 좀 더 흐른 후 더 이상 발 디딜 곳도없는 곳까지 몰린 후 다행히 취직이 되었다. 첫 회사는 소규모 스타트업 회사로 월급은 적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 사정은 크게 나아졌다. 


가장 좋았던 것은 한 달에 한 번씩 정해진 액수의 돈이 들어 온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루틴은 나의 마음을 대단히 윤택하게 만들어주었다. 언제 돈이 이만큼 들어오니까월세같이 위급한 곳에 얼마를 쓰고 남은 돈으로 무엇을 사고 그리고 또 남으면 저축을 하고 하는 경제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저축이라니. 저축이라니. 

그것은 농경을 시작해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고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어 곡식을 저장할 수 있게 되어 잉여라는 개념을 발생시킨 신석기 혁명 같은 일이었다. 


고정 수입이 없던 프리랜서 시절에는 돈에 대한 계획도 없었고 미래도 없었다. 수년 동안이나 이 고정 수입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나 빼고 다들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나 배신감이 들 정도로 큰 충격이 몰려왔다. 


그 뒤로 10년 이 넘는 세월 동안 직장인으로 살아오며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을 법도 한데 여전히 월급날이 무척 신이 난다. 한 달 뒤 이날에 또 이만큼 입금될 거라는 사실이 마음을 풍족하게 만든다. 고정 수입은 정말 중요하고 좋은 것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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