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밤바다'노래 한곡으로 전라남도 여수시의 땅값을 올려놓았다는 버스커버스커의장범준만큼은 아니지만 피천득 선생은 춘천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사람들에게 인지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한 지분이 있다. 나 역시 과거에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통해 춘천의 첫인상을 마음속에 아로새기게 되었다. 행정구역상, 지리상의 춘천은 알고 있더라도 도시가 가진 이미지는 어떤 경로로 그곳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있는 것이다.
춘천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생각을 한 때부터 국민 수필 《인연》에 대한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내가학생일 때어느 시기에 어떤교과과정에서 이 수필을 다루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나 《인연》이라는 작품에 특별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무렵 좋아했던가수 김민종의 5집 앨범 재킷을 보고 나서이다. 동명의 곡을 타이틀로 삼은 이 앨범의 카세트테이프 표지 하단에는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고작 중학생이었던 나에게도 어떤 처연하고 아련하며 가슴 저릿한 스토리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 한 문장의 매력에 이끌려 바로 작품의 전체를 찾아 읽어 보았는지 어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한 문장으로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두근거릴 수도 있다는 것은 이때부터 알게 되었다. 춘천과의 인연, 춘천에서 처음 맞는 봄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작품의 도입부, 첫 문장에서부터 춘천이라는 도시가 언급이 되는데 춘천을 몰랐던 사람이라면 여기서부터춘천이라는 공간에 대한 상상이 시작된다. 그러나 춘천은 이야기의 무대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마치 춘천에서 있었던 사연을 작품으로 만든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꼼꼼히 읽어보면 사실 모든스토리는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있었던 일이다. 작가가 춘천에서가보려고 했던 곳은 성심여자대학이다. 특별한 사연이 있다는 작가가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그저성심여자대학이 사연의 주인공 아사코가 동경에서 다녔던 성심 소학교와 같은 가톨릭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이야기가동경이 아닌 춘천에서 펼쳐진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끝맺는 마지막 문장에서 독자의 혼돈을 심화시킴은 물론이다.
국민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당시 일본의 소학교가 현재 우리나라의 초등학교와 동일한 학제로 운영이 된 것이라면 첫 번째 만남에서 성심 소학교 1학년이었던 아사코는 지금 우리 딸아이만 했을 것이다. 처음 만난 날 호감을 가지고 낯선 이에게 스위트피를 한 아름 꺾어 꽃병에 꽂아준 아사코의 깜찍함을 생각하며 며칠 전 딸아이에게 스위트피 꽃을 검색해 사진을 보여주었다.그리고이 꽃을나에게선물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로 딸아이는 길을 걷다 비슷한 색깔의 꽃이 보이면 이 꽃이 스위트피가 아니냐 물어보았다. 작품 속 아사코의 행동이 소학교 1학년 소녀 치고는 성숙하다 생각되긴 하나 딸아이가 스위트피를 찾는다면 아빠에게도 똑같이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아사코가 다시 생각나 대뜸딸아이에게실내화 가방은 요즘 왜 안 들고 다니냐 물으니 의아한 표정으로 교실에 신발장이 따로 있어서 두고 다닌다고 한다.
우리 딸도 영문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이 될 수도 있겠지. 양팔에 한아름 책이나 노트 따위를 껴안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영양이 되어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아빠와 나누어 봄 직도 하다. 아사코와의두 번째 만남에서 작가는 아사코가 다니는 대학에 같이 가보았고 아사코는 그날 강의실에 두고 온 연둣빛 우산을 챙겨 나왔다. 피천득은 그 빛깔이 고와서 쉘부르의 우산 같은 영화를 좋아하게 된지도 모른다 했다. 어떤 강렬한 기억은 오랫동안 우리 주위를 어떻게든 맴돌게 되는 것이다.
춘천에서는지금 집 주위며, 나서는 걸음마다 참꽃과 개꽃이 피기 시작했고 목련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목련과 같은 20대를 보낼 딸아이를 상상하면서 이 꽃이 눈에 띄면 꼭 이름을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아사코와의 두 번째 만남까지는 설렘과 반가움 그리고 서로의 인생에 대한 순수한 응원 같은 감정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세 번째 만남. 십수 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싱싱하여야 할 아사코가 시들어가는 백합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피천득 선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거기다 남편은 일본인도 미국인도 아닌 진주군임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지나면서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침착하고 간결한 표현으로 작가는 모든 감정 설명을 대신한다.
최근 다시 《인연》을 읽으면서 새롭게 눈에 들어온 부분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이 4월이었다는 것과 스위트피, 목련, 백합으로 만남마다 이어지는 아사코와 꽃에 대한 직유의 변화.
그리고 아사코와의 작별인사 방식이다.
첫 만남에서는 껴안고 볼에 입을 맞췄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가벼운 악수를 했다. 세 번째는? 악수도 없이 절을 몇 번씩이나 하고 헤어졌다. 아사코 스스로도 본인이 인생의 절정을 지나 시들어감을 결코 보이기 싫었을 것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꽃을 피우듯 인생의 절정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인생의 절정을 한참 지나온 나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인연》을 통해 다시 내 인생의 절정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하루하루 노화는 진행되고 있겠지만 누구에게도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그런 모습이 되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월이고 나는 춘천에 있다. 오는 주말에는 한림성심대학교에 가볼 생각이다. 작가가 가보고 싶어 했던 성심여자대학은 춘천에서 부천으로 십 수년 전 이전을 했고 교명도 여러 번 바뀌었다. 지금의 한림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성심'이라는 글자라도 들어간 춘천의 대학교 캠퍼스 벤치에 앉아 피천득의 《인연》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목련꽃이 피어 있다면 더 좋겠다. 현장 독서법의 감동이 훨씬 커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