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래불사춘 Apr 13. 2021

전원주택의 필수코스, 손님맞이

다음날 하루 이틀 고생스럽더라도


전세계약을 하고 입주하기까지는 육 개월이 남아 있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육아휴직 시기를 맞추어 3월 즈음 입주하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 임대로 나온 전원주택을 서너 군데 보았고 지금 집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는데 계약시기와 입주시기가 너무 큰 차이가 났다. 그러나 이 집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곧 다른 계약이 이루어질 것 같아서 기간이 오래 남았음에도 계약을 강행했다.(살던 집이 나가기 전 이사할 곳을 먼저 계약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우리가 첫 입주였는데 육 개월은 비워 두기에 긴 시간이었다. 또 겨울철 기본 난방비가 들어가는 주택인지라 집주인의 요청도 있고 해서 12월부터는 우리가 관리하기로 하고 이사 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며 알아서 잘 활용하기로 했다.




입주 전 두세 번 정도 주말 펜션처럼 이용했고 이쪽으로 여행을 왔던 처제네 임시 숙소로 빌려주기도 했으니 유용하게 활용한 셈이다. 가족들이 몇 차례 구경 오기도 했으나 아직 이사 전이라 아무것도 없는 휑한 집의 구조만 대충 둘러보고 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이사도 했고 집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전원주택의 로망. 손님맞이가 본격적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누구나 전원주택 하면 넓은 마당에서 좋아하는 지인들을 초대해 바비큐 그릴로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며 하하호호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할 것이다. 나 역시 매주 찾아오는 손님들과 숯불을 피우며 시시한 잡담도 하고 살아온 과거, 살아나갈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유쾌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모습을 그려왔다.


정리에 걸리는 시간과 봄 늦게까지 쌀쌀한 강원도의 날씨를 고려하여 4월 중순부터 손님맞이 스케줄을 잡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의 일정을 미리 잡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초대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주 드디어 첫 손님을 모셨다.


첫 손님은 아내와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 춘천에 자리 잡아 아이 둘을 키우는 가정이었다. 부모와 아이들 모두 나이가 엇비슷하다 보니 금방 친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나와도 미리 오가며 두어 번 정도 인사를 한 사이인 데다 동갑에 대학 동문이라는 공통분모까지 있어 자리는 역시 금방 무르익었다. 상상 속 그림대로 아이들은 첫째끼리 또 둘째끼리 집안과 마당을 뛰어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고 옆집 강아지를 들여다 보기도 하며 아주 잘 놀았다. 물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음식을 흘리기도 하고 그랬다.


어쨌거나 그러는 사이 막걸리에 홍어로 시작한 술자리는 에피소드에 에피소드를 거듭하며 막걸리 종류를 두어 번 바꾸고 막걸리에서 맥주로, 맥주에서 소주로 갈아탔으며 홍어와 훈제오리, 꼬막, 삼합, 김치전, 황태, 오렌지, 딸기, 라면, 김과 과자 부스러기까지 탈탈 털어 먹고 나서야 술자리는 파할 수 있었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빈 막걸리통, 허리가 찌그러진 맥주 캔들, 따놓고 끝까지 비우지 못한 소주병들이 상 위에 가득했다. 오후 세시에 방문해서 자정이 넘어 돌아갔으니 자리를 모두가 즐긴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첫 만남을 좋아하고 또 첫 만남에서 첫 만남 같지 않게 깊고 다양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러려면 술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날도 내가 좋아하는 모든 조건이 충족된 날이었을 게다. 이야기는 정체되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이어졌으며 처음 만난 사람한테 꽤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스스로에게 놀라는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공간이 가지는 힘이 분명히 있다. 구체적으로는 그 공간의 온도, 습도, 향, 개방감, 뷰, 앉은자리의 편안함 등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속 깊은 얘기들도 쉽게 꺼낼 수 있다. 때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내 집을 그런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최소한 불편하지 않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들은 대부분 그 시간보다는 공간의 영향인 경우가 많으니까.  사건의 때보다는 장소에 주목을 하는 것처럼. 


이제 날이 따뜻해지면서 예약된 손님들을 하나둘 맞을 준비를 다시 시작한다. 흔들의자와 해먹을 데크에 내놓고 바비큐 그릴은 활용도를 고려하여 캠핑용으로 주문했다. 아이들의 텐트도 데크 한 공간을 멋지게 차지할 것이고 아파트에서 버릴 작정이었던 오래된 원목식탁은 아이의  작업용 야외테이블로 멋지게 변신했다. 빨리 토치를 사고 숯을 뒤쪽 창고에 쟁여 놓아야겠다. 냉장고 둘 중 하나는 얼른 안 먹는 음식을 정리하고 종류별 주류로 가득 채워 놓을 것이다. 1층 서재는 언제든 게스트룸이 될 수 있도록 이불 몇 채와 칫솔, 갈아입을 옷, 핸드폰 충전기 따위를 준비해 두어야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과 사진을 한 장씩 꼭 남겨두고 싶은데 매번 까먹는다. 시간이 되는 한 나눴던 이야기들도 메모해 두어야지.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다음날 아침.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설거지 더미와 마당에 널브러진 장난감들, 언제 생긴지도 모를 바닥의 얼룩쌓여있는 빨랫감을 술이 채 덜 깬 상태로 처리해야 하지만 좋은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에 비할 수 없다.


안빈낙도는 멀리 있지 않았다.

오늘 다 못하면 내일 하면 된다.


포털사이트에서 안빈낙도를 검색한 결과. 술은 필수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방직 공무원, 어디서 하든 똑같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