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2019년에 다녀온 유럽 여행 에세이입니다)
chapter 2. 포르투에서 남들과 다른 길을 가보다
포르투의 일출을 보기로 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포르투 하면 ‘일몰’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절대 하지 않는 선택이었고, 특히 유럽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가 일출을 보러 갔을 때도 우리 외에는 동양인 한 분만 계실 뿐이었다. ‘동양인은 부지런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두새벽에 동루이스 다리에 간 터라 게스트 하우스에서 나올 때는 거리가 칠흑같이 어두웠는데, 시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환해졌다. 하늘은 물감이라도 떨어뜨린 듯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고, 점점 포르투의 마을을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했다. - 2019년 2월 포르투에서
포르투에서 일몰을 보지 못해 뾰로통해진 날 위로하며 ‘일출’을 보자고 제안해준 남자 친구. 일출은 봐야 했기에 새벽에 꼭 일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알람을 맞추기가 좀 애매했다. 우리 외에도 2인이 더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깨우기엔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우리는 휴대폰 화면만 켜지는 알람을 선택했고, ‘일출은 꼭 봐야 한다. 못 일어나면 100 퍼 후회할 거다’라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다행히도 남자 친구가 새벽에 일어나서 날 깨어준 덕분에 일출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캄캄한 새벽이라 지금 나가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았지만, 숙소에서 동루이스 다리가 꽤나 멀었기 때문에 서두르기로 했다.
포르투의 새벽 거리는 참 고요했다. 낮에는 여행객들로 붐비는 이곳에 사람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고, 그저 주황 불빛만 거리를 비추고 있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 친구는 신나 보였다. ‘새벽에 나오니까 어때?’라고 물으며 거리를 뛰어 보기도 하고, 해가 좀 있으면 뜰 것 같다고 얼른 가자고 했다. 남자 친구의 말에 나도 덩달아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도착한 동루이스 다리. 우리의 발이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해가 뜨기 시작했다. 하늘은 납작붓으로 빨간 선을 그은 듯 수채화처럼 붉어졌고, 어둡던 거리는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풍경을 보고 있으니 정말 벅차오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동’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포르투의 일출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이 풍경을 우리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행복해졌다. 마치 우리가 동루이스 다리를 통째로 예약한 기분이 들었고, 우리는 그저 다리를 붙잡고 서서 아름다운 풍경을 계속 음미하며 들여다보면 됐다.
남자 친구는 내가 너무나도 포르투의 일출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해했다. ‘어때?’라고 묻는 말에 웃음이 잔뜩 묻어있었다. ‘일출’을 생각해 낸 본인이 너무나 자랑스러운 거다. ‘와 진짜 대박이야. 너무 예뻐’라는 말에 남자 친구의 입은 하트 모양이 됐고, 그도 이제 나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놓고, 풍경을 즐겼다. 포르투의 일몰이 ‘보랏빛’이라면 일출은 ‘분홍빛’에 가까웠다. 누군가 ‘포르투에서 어떤 게 제일 좋았어?’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항상 포르투의 일출을 이야기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일출 볼 생각 못했는데... 그렇게 예뻐?’하며 아쉬워했고, 나는 그런 친구들을 보며 뿌듯해하곤 했다.
우리가 포르투에서 ‘일출’을 본 건 남들과 다른 경로를 택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도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더라도, 그저 묵묵히 가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직접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 이러한 행동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선물을 가져오기도 한다. 포르투에서 ‘일출’을 택한 뒤로 나와 남자 친구는 새로운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우리가 선택한 길의 끝에 어떤 게 나올지 예상하지 못할 지라도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나는 굉장히 평범한 성격이라 덕후 기질은 없는 편인데, 내가 유일하게 열광하는 것이 있다. 바로 해리포터다. 방학만 되면 해리포터 시리즈를 항상 몰아봤고, 최근에 왓챠에 해리포터 시리즈가 올라온 것을 보고, 왓챠까지 결제해서 해리포터를 볼 정도이다. 이 정도로 해리포터 덕후인 내가 포르투에서 절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를 쓴 카페와 해리포터를 쓸 때 영감을 받았다는 렐루 서점이었다. 그녀가 다녀간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기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친구에게 말했더니 카페는 가줄 수 있는데 서점은 자신이 사람 붐비는 곳을 싫어해서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사실 낯선 곳에서 혼자 다니는 걸 못하긴 했는데 이런 나의 기질을 뛰어넘을 정도로 서점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카페는 남자 친구와 가고, 서점은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를 쓴 카페는 생각보다 커피도 맛없고, 빵도 맛이 없었다. 작가의 명성 때문에 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에 비해 음식 맛이 못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빵을 한 입 베어 먹었는데 고무를 씹는 맛이었고, 너무 딱딱했다. 커피 맛은 내가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커피들에 익숙해서인지 아무 맛이 안 났다. 음식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그녀가 여기에서 어떻게 해리포터를 썼을까 하며 상상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녀는 어디에 앉았을까. 그리고 어떤 생각으로 해리포터를 집필했을까. 그녀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찾아보려 애썼던 것 같다.
다음으로 렐루 서점은 혼자 다녀왔다. 해외여행을 할 때 한 번도 그 나라의 서점에 찾아본 경험이 없는데... 처음으로 포르투에서 현지 서점을 찾았다. 이곳도 조앤 롤링으로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남자 친구가 왔으면 정말 기절했을 거다. 사람들 틈에 끼여 다양한 책들을 구경하고, 해리포터 기숙사 계단같이 생긴 렐루 서점의 계단도 올라가 보았다. 계단의 난간을 잡고 올라가는데, 헤르미온느가 해리포터에서 난간을 잡고 뛰어 올라가는 장면이 떠올랐고, 나는 금세 해리포터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서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사람들은 사라지고, 서점과 나만 남은 기분이었다. 서점에 왔으니 책을 들여다보자는 생각으로 몇 권의 책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우연히 그림이 많은 책들을 뽑아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폼 나게 책도 구입해 볼까 생각했지만, 왠지 안 읽을 것 같아서 패스하고 나왔다.
렐루 서점에서 나오자 공원에서 남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서점을 구경할 때는 같이 따라오지 않은 남자 친구가 조금은 원망스러웠지만, 나무에 기대 편하게 쉬고 있는 남자 친구를 보니 혼자 갔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친구는 내가 렐루 서점을 구경하는 동안 푹 쉬어서 체력을 회복했고, 나의 경우 내가 보고 싶은 서점을 구경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다시 좋은 컨디션으로 여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때 한 가지 배웠던 건 연인이든, 부부든 모든 걸 같이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한쪽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하자고 강요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하나의 인격체이고,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같이 할 수 없다면, 지혜롭게 따로 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깊게 깨달아서 일까. 결혼하고 나서도 각자의 영역을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포르투에서 여행하는 내내 마셨던 오렌지 주스다. 통 오렌지 즙을 짜서 통에 담아주는 기계가 있는데, 정말 저렴한 가격으로 신선한 과일 주스를 마실 수 있다. 우리의 소울 푸드였다. 우리나라에서 오렌지 주스를 먹을 때마다 맨날 유럽의 오렌지 주스를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포르투에서 곧 스페인으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남자 친구가 지도에 큰 공원이 하나 보인다고 그곳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포르투 여행을 검색했을 때 단번에 나오는 곳은 아니었는데, 나는 남자 친구의 말을 따라보기로 했다. ‘일출’을 선택한 멋진 남자 친구였기에.
직접 가보니 옆에는 강이 졸졸 흐르고, 멋진 나무들, 그리고 포르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었다. 이곳은 약간 나에게 디즈니 성처럼 보였다. 라푼젤이 머리를 내리는 곳 하면 딱 떠오르려나. 그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포르투에서 새로운 길을 택한 건 너무나 잘한 선택이었고, 우리는 덕분에 포르투의 마지막 날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epilogue>
휴대폰, 인터넷, sns 이렇게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 여행지를 정하지 않고 가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처럼 그저 발 가는 대로, 이끄는 대로 가다 보면 현지인처럼 유럽을 즐길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느낀 이러한 감정들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집 근처 동네를 산책할 때도 ‘오늘은 안 가본 길로 가볼까?’하며 남편과 걷기도 하고,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보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인생을 더 재밌게 만든다. 앞으로도 계속 남들이 안 가본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