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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원 Jan 10. 2024

2023 후유증

 낯선 처음을 맞이할 때, 과연 마지막 날이 올까? 한껏 겁쟁이가 되곤 한다. 막막하기만 했던 2023년의 처음들이 하나하나 마지막을 고하고 있다. 매우 시원할 줄 알았던 마지막들은 연말이라고 봐주지 않는 또 다른 급한 일들에 묻혀 덤덤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다. 12월 마지막 주에 겸임 학교 종업식, 일주일 뒤에 본교 종업식을 했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은 큰 아이 졸업식. 근무하는 학교 스케줄과 겹치지 않아 모처럼 편한 마음으로 온 가족이 참석할 수 있겠다며 안도했는데, 늘 디폴트값이었던 나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그 어느 때보다 심신이 힘겨웠던 작년 한 해, 산 하나 넘으면 더 큰 산이 눈앞에 나타나 길을 막을 때마다 꾹 참아보았다가 울어도 보았다가 일어나기를 수 차례. 더 이상 버틸 긴장의 끈이 풀려버렸는지 방학 하루 전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먹어도 속이 부대꼈고 머리는 지끈지끈, 온몸에 힘이 없었다. '토요일 아침 함께 동네 교육 회관으로 출동하여 배드민턴을 치고, 도서관에 가자'는 새해 우리 가족 야심 찬 주말 계획은 첫 스타트부터 곤란해지고 말았다. 


학기말 컨디션이 훅 떨어지는 현상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교무실에서 동료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컨디션이 급격히 저하된다 싶으면 어김없이 학기말 시즌이 다가온 거라고. 학교 안팎으로 좋은 일만큼이나 슬픈 일, 상처되는 일도 참 많았네. 씁쓸한 웃음이 지나간다. 이관할 문서, 보관할 문서, 생기부 오류는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한다. 담임을 맡은 해에는 반 아이들과 직접 인사를 주고받으며 마지막을 더욱 생생하게 실감하지만 업무를 맡은 해라 자리를 정리하면서 차분히 돌아볼 수 있었다. 똑똑똑! 문이 열리고 평소 조용하던 한 남학생이 문을 연다.

" 저, 마지막 인사 드리려고요. 한 해동안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

 3교시면 끝나는 종업식 날 다른 층에 있는 비담임, 교과 선생님을 일부러 찾아와 인사를 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현장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 감동스럽고 고마운 마음이 크다. 얼마 전 겸임 학교 마지막 출근 날에도 마음이 따뜻해진 순간이 있었다. 방학식 날 교과 시간은 방학에 들뜬 설렘과 마지막 날, 수업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로 조금은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수업 끝종이 울리고 아쉽기도 시원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최대한 담백하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동시에 뒷 문이 열린다. 일 년 내내 바른 자세로 잘 참여하던 학생이 나오더니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한다. 정말 감사했다고. 일 년 동안 목소리 한번 들어본 기억이 없는 여학생도 따라 나와 아기자기하게 캔디를 포장한 꾸러미와 손 편지를 수줍게 건넨다.


자칫 헛헛해지기 쉬운 연말 연초에 나를 살리는 고마운 메시지들이 당도한다. 4년 전 졸업생의 어머니는 그 이후로도 잊지 않고 안부 메시지를 보내주시는데 이번 새해에도 따뜻한 말씀을 전해주신다. 오래전 여러 사고를 치며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졸업생도 군대에서 잘 생활하고 있다며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졸업 이후 5년째 안부메시지 주시는 학부모님



 어느덧 졸업을 하게 된 큰 아이는 방송부, 전교회장단 활동을 하며 알차고 즐겁게 학교 생활을 했다. 졸업식에서도 친구들과 댄스 공연을 선보였다. 6학년 한 해동안 학급에 문제가 많아 담임 선생님이 2번이나 교체되고 3번째 담임 선생님과 졸업을 맞는다. 3달 동안 함께한 담임 선생님이지만 아이는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많이 울었다. 직접 뵙고 보니 목소리로 듣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어리고, 여린 분 같아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 마음이 아렸다. 


다행히 큰 아이의 졸업식 참석까지 무사히 미션 클리어하고,  난 지금까지도 계속 골골거리고 있다. 방학한 아이들의 삼시 세끼와 가정에서의 공부를 책임져야 하므로 맘 편히 쉬지는 못하지만 틈만 나면 누워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다. 태권도 학원 가기 전에 엄마를 깨우라고 했더니, 둘이서 계란 프라이, 찌개, 김을 차려 오물오물 맛나게 먹고 있다.

 

 여기서 더 내려놓을 것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아팠던 애증의 2023년을 이쯤 해서 잘 보내려 한다. 후유증으로 무너진 심신도 내일은 오늘보다, 모레는 내일보다 더 나아질 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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