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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원 Jun 05. 2024

어느덧 6월

4개월간의 여정

네 달이 흘렀다. 늘 마음에 얹혀있었지만 쉬이 브런치 글쓰기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올해 새로 만난 학생들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악명 높은 2학년을 맡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중2시절이 질풍노도의 최고봉의 시기라 중2병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학생들은 입학할 때부터 활약이 대단했다. 보통 중학교 1학년이라 함은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해 담임 선생님의 입을 보고 있다가 움직이는 귀여움과 빳빳한 새 체육복을 입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긴장감을 내보여야 마땅한데, 이 녀석들은  3학년 선배들에게도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물론 교권 회의도 연달아 열렸다. 그들의 담임 선생님들은 늘 지쳐있었고, 평소 넘치는 에너지를 자랑했던 한 선생님이 휴직을 결정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새 학년 팀이 꾸려지고 바짝 긴장했다. 2월 중순부터는 이 학생들의 생활 지도에 온 힘을 다 해오고 있다. 우리 반에도 옆 반에도 그 옆 반에도 매일 사건 사고는 빵빵 터진다. 학년 교무실은 쉬는 시간, 점심시간도 없이 지도받는 아이들과 선생님들로 정신이 없다. 가끔 그 공간에 앉아 있다 보면 호흡이 힘들 때가 있다.


개학 다음 날 우리 반에서는 여학생들 간의 싸움이 있었다. 여학생들의 싸움은 중재하기도 상담을 하기도 어렵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지 않고 등장인물이 많으며 패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농후했고 그간의 복잡한 감정들이 얽히고 설켜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학생들 파악도 되지 않았던 개학 이튿날, 아직 래포가 형성되지 않은 담임에게 마음을 열기 불안했던 그 여학생은 전학을 결정했고, 나는 개운치 않은 마음을 뒤로한 채 아이가 원하는 방법대로 전학 절차를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 학생들의 특징은 대답을 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어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기본 생활 태도와 매너를 가르쳐야 했다. 내 말을 듣게 하려면 어서 친해지는 수밖에 없다. 매일 종례 후 한두 시간 상담을 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께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아이를 남겨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함께 청소했다. 등교 길에 담배를 피우며 오다 주민들에게 신고가 들어온 아이, 화장실에 화장지를 마구 풀어서 엉망을 만들어 놓는 아이, 욕하는 아이, 자해하는 아이, 실내화 신고 등교하는 아이, 지각하는 아이 등등. 수업 이외에 말하는 것을 크게 즐기지 않는 내향인인 내게 매일 한도 초과 말하기의 결과는 퇴근 후 두 남매에게 기력 없는 무표정한 엄마의 모습...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는 아이들에게 맞장구쳐주며 제대로 웃어주지도 못했다.


힘들지만 동료 담임교사들과 서로 응원하며 잘 버텨왔는데, 5월에 들어서며 생활교육위원회와 교권 위원회가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선생님의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아 도리어 학부모님의 불만이 들려오고 학생들과 골이 깊어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공황 장애가 올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키도 몸집도 성인보다 큰 남학생이 선생님의 지도에 불응하는 모습, 애쓰시는 선생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흘러버렸다. 학생부에서는 목격자 진술문을 작성해 주라고 양식을 보내왔는데, 이런 걸 문장으로 쓰고 있자니 가슴이 턱 막혀왔다.


 4월 말 시험 기간,  시험 감독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한쪽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다리를 절었다. 고관절과 허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오른쪽 눈이 심하게 부어 2주일이 넘도록 가라앉지 않았고, 입술에는 포진이 생기고 쓰라린 통증이 심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간의 공력에 약간의 희망적인 일들도 있다. 거친 남학생들이 내 지도에 응한다. 심지어 대답도 한다. 찬바람이 쌩쌩 나던 여학생은 이제 화장품을 뺏기면서도 수업 시간에 안 할 테니 주시면 안 되냐고 애교도 부린다. 자해하는 아이의 손과 팔을 쉬는 시간마다 가서 살피고, 불안하거나 억울하면 눈물이 차오르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독였더니 하굣길에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90도 인사를 한다. 반면에 사고뭉치 학생들을 보살피는 동안 스스로도 잘해주는 모범적인 학생들에게는 말 한마디 붙여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늘 미안하고 고맙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감히 단정 지을 수 없다. 정년퇴직까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업 연구를 하며 학생들과 배움을 논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안타깝게도 찾기 힘들다. 매일이 전쟁이지만 친한 지인들 앞에서 몇 마디 투덜대다가도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책임감과 성실함이 발동하여 이 학생들을 모른 척할 수 없다.


다만 병원 약을 달고 살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다짐한다. 학교에서 나올 때는 스위치를 끄고,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남매를  안아줄 에너지는 꼭 남겨놓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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