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한 디자이너의 질문법

디자인 툴 켜기 전에 메모장부터

by 고경아

"패키지 디자인 좀 해주세요." 클라이언트에게 이런 의뢰를 받으면 10년 차인 지금도 덜컥 겁부터 난다. 그저 '예쁘게' 만들어 달라는 말 뒤에 숨겨진 수만 가지의 제약 사항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신입 시절의 나는 디자인을 의뢰받으면 곧장 레퍼런스를 찾고 스케치부터 시작했다. 좋은 레퍼런스를 찾고 시안 작업을 많이 할수록, 모니터 속의 패키지는 점점 완성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제작에 들어가면 문제가 터져 나왔다. 예산이 초과되어 생산 부서에서 반려당하고, 작업이 힘들다며 물류 부서에서 난색을 표했다. 패키지의 소재와 구조 때문에 배송 과정에서 훼손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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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제작과 관련한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이번에는 진짜 시말서 각이다', '이거 내 월급으로 물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고민한 적도 많다. 프로젝트 관계자들의 컨펌을 기다리며, 피가 마르는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됐다. 패키지 디자인은 물성에 브랜드의 미감을 담아내는 예술인 동시에, 제작 공정의 효율을 다루는 치열한 설계이자 비즈니스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디자인 툴을 켜기 전에 '현실의 질문'을 먼저 던진다. 예쁜 그래픽을 입히기 전, 이 패키지가 놓일 현실의 좌표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이번 패키지 ‘왜’ 만드시나요?

(Development, Variation, Renew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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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시작은 '왜'를 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클라이언트가 패키지를 의뢰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는 것인지(Development), 기존 제품 라인을 확장하는 것인지(Variation), 아니면 오래된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하고 싶은 것인지(Renewal)에 따라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예를 들어, 칠성사이다처럼 수십 년 된 브랜드가 '제로' 라인을 출시할 때는 기존의 강력한 자산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움' 한 방울을 떨어뜨려야 한다. 반면, 완전히 신규 브랜드를 론칭한다면 시장에서 눈에 띄기 위한 과감한 차별화가 필요하다. 이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면, 디자이너는 엉뚱한 답안지를 들고 헤매게 된다.

고경아_PMC_2강자료_페이지_10.jpg 출처: 롯데칠성음료


디자이너의 상상력 vs 물류팀의 현실

화면 속 디자인이 현실의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중 디자이너가 가장 간과하기 쉬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물류'와 '단가'다.


1차 포장(제품 용기)과 2차 포장(박스), 그리고 택배 박스에 이르기까지. 내 디자인이 고객의 손에 닿기 전, 물류 센터의 파렛트 위에 어떻게 쌓일지까지 상상해야 한다. 적재 효율이 떨어져 물류비가 두 배로 나온다면, 그 디자인은 실패한 디자인이다.

고경아_PMC_2강자료_페이지_29.jpg 출처: 동아일보, 중부일보, 컬리

쿠팡의 로켓배송으로 나가는 제품과, 마켓컬리의 샛별배송으로 나가는 제품, 백화점 선물 코너에 들어가는 제품은 패키지의 재질부터 구조까지 달라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 유통되고 판매되는지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은 결국 '예쁜 쓰레기'가 되어 제작까지 갈 수 없을뿐더러, 영원히 디자이너의 하드에 잠들게 된다.



최소 비용, 최대 효과의 미학

가끔 "돈을 많이 쓰면 당연히 예쁜 패키지가 나오지 않나요?"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물론 비싼 종이에 화려한 후가공을 입히면 고급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패키지 디자이너의 역할은 한정된 예산 안에서 브랜드가 보여주고 싶은 최상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최소 비용, 최대 효과'. 너무 상투적인 말 같지만, 패키지 디자이너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없다. 카누(KANU)의 패키지처럼, 때로는 단순한 종이 상자에 강렬한 컬러 하나만으로도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

고경아_PMC_2강자료_페이지_11.jpg 출처: 카누

불필요한 포장재를 줄이고, 인쇄 도수를 낮추면서도 시각적인 임팩트를 놓치지 않는 것. 공정을 최소화해 제작비를 아껴주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브랜드를 살리는' 디자인이자,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결국 디자이너는 문제 해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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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디자인 프로젝트는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니다. 상품기획팀, 마케팅팀, 인쇄소, 제작사, 물류 센터까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요구 사항이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다. 마케팅팀은 "더 눈에 띄게"를 외치고, 제작사는 "그 구조는 단가 맞추기 힘들다"고 난색을 표하며, 경영진은 "손해 볼 수 없다"며 압박한다.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최적의 해답을 내놓는 사람이 바로 디자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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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브랜드가 있다면 저마다 처한 상황과 목표에 맞는 100개의 해결책이 있다. 브랜드 경험을 실현하는 패키지에 예산을 사용하는 경영진 입장에서는 이 투자의 결과가 확실해야 한다. 그래서 BX 디자이너가 만드는 그래픽 뒤에는 치밀한 계산과 논리가 숨어 있어야 한다.


혹시 지금, 막연히 "예쁜 상자"를 꿈꾸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잠시 마우스를 내려놓고, 질문을 먼저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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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막막한 질문들을 설득력 있는 기획으로 바꾸는 과정을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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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eedbluetiger.co.kr/pmc_KoKyeong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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