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의 모호한 피드백에서 벗어나는 법
"디자인은 참 좋은데, 뭔가 우리랑 안 맞는 것 같아요."
"조금 더 심플하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은 없을까요?"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들이다. 클라이언트의 모호한 피드백 앞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그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스무고개를 하듯 시안을 쳐내다 보면, 밤샘은 일상이 되고 자존감은 바닥을 친다.
클라이언트는 왜 저렇게 모호한 피드백을 하고, 내 디자인은 왜 거절당했을까? 돌이켜보면 가장 참기 힘든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일단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다. 빈 캔버스를 열고, 레퍼런스 폴더를 뒤적이며, 그럴싸한 그래픽 요소를 얹어보는 과정은 확실히 즐겁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나오니 일하는 기분도 난다.
하지만 수없는 '까임'과 수정 지옥,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일을 겪으며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지 못하는 디자인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미완성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설득의 힘은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탄탄한 '기획서'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기획서를 나침반이라고 부른다. "제 눈엔 이게 예뻐서요"라는 주관적인 감상을 "이러한 전략에 의해 도출된 결과물입니다"라는 객관적인 솔루션으로 바꿔주는 힘. 그것이 바로 기획서가 가진 마법이다.
프로젝트를 맡으면 가장 먼저 경쟁사 제품들을 모조리 긁어모은다. 실물 패키지를 사보기도 하고, 온라인 상세페이지를 캡처해 분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의 화면에 넣고 해부해본다. 타겟은 누구인지, 주로 어디서 팔리는지(판매처), 가격대는 얼마인지, 패키지에서 강조하는 핵심 키워드는 무엇인지.
이렇게 분석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브랜드 포지셔닝 맵'을 그린다. 가로축을 '가격(프리미엄 vs 합리적)', 세로축을 '디자인 무드(단순하고 호불호가 없는 vs 개성과 희소성)', '브랜드 히스토리(헤리티지 vs 혁신적)' 등으로 설정하고 경쟁사들을 배치해 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빈 공간이 보인다. 남들이 선점하지 않았거나 혹은 우리 브랜드가 가진 강점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새시장.
그 빈틈이 바로 우리 브랜드가 깃발을 꽂아야 할 목적지이자, 소비자에게 어필해야 할 소구점(Selling Point)이 된다. 이 좌표가 명확해져야 비로소 디자인의 컨셉이 '차별화'라는 힘을 갖게 된다. 남들과 달라 보이기 위해 무작정 화려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빈 곳을 공략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에 띄는 디자인이 나오는 것이다.
"2030 여성 타겟입니다." 기획 단계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지만, 디자이너에게 이보다 불친절한 가이드도 없다. 패키지 디자인에서 타겟은 훨씬 더 뾰족해야 한다. 단순히 나이와 성별을 넘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 그리고 우리 제품을 만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반려동물 영양제를 만든다면 타겟은 단순히 '반려인'이 아니다. "내 건강보다 강아지의 건강을 더 챙기며, 성분 하나하나를 꼼꼼히 따지는, 인스타그램에서는 강아지 건강 정보 계정을 팔로잉하고 있는 깐깐한 집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 패키지가 놓일 '무대'를 파악하는 것도 필수다.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 아래 놓일 제품인지, 택배 박스에 담겨 문 앞에 던져질 제품인지에 따라 종이의 질감부터 그래픽의 밀도까지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온라인 자사몰의 상세페이지에서 보여지는 썸네일과, 오프라인 매대에서 스쳐 지나가는 0.5초의 승부는 엄연히 다른 문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획서에 담아야 할 것은 '경험'이다. 패키지 디자인은 단순히 포장지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소비자가 제품을 인지하고, 구매를 결정하고, 박스를 열어 제품을 마주하는 그 모든 과정을 설계하는 일이다.
나는 이것을 '소비자의 브랜드 경험 단계'라고 부른다. 브랜드마다 소비자를 어떤 접점에서 주로 만나게 되는지, 어떤 접점이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 브랜드를 보여주는지를 파악하면 앞으로 해야 할 수많은 디자인 요소 중에 우선순위가 생긴다. 그래야 디자인을 만드는 시간과 예산을 선택과 집중해서 사용할 수 있다.
어떤 브랜드 택배 박스를 뜯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문구는 무엇이어야 할까? 본품을 꺼낼 때의 손맛은 어떠해야 할까? 다 쓴 패키지를 버릴 때 분리배출은 쉬운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기획서에 담겨 있어야 한다. 그래픽은 그 경험을 시각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논리적인 경험 설계가 뒷받침되지 않은 그래픽은 공허하다. 하지만 탄탄한 기획 위에 얹어진 디자인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디자이너가 굳이 기획서까지 써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하고 싶다.
기획서는 클라이언트에게 우리 디자인의 당위성을 증명하는 증거 자료이자, 모호한 피드백으로부터 디자이너의 중심을 잡아주는 안전바 역할을 한다. 감각적인 비주얼 뒤에 치밀한 논리가 숨어있을 때,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를 단순한 작업자가 아닌 비즈니스 파트너로 존중하게 된다.
막연한 감으로 일하는 것이 불안하다면, 혹은 내 디자인을 논리적으로 변호하고 싶다면. 이제 모니터 앞에서 고민만 하지 말고, 당신만의 기획서를 써 내려가 보길 권한다. 그 종이 한 장이 나의 야근을 줄여주고, 클라이언트 앞에서 당당하게 내 디자인을 제안할 수 있는 뒷배가 되어준다.
나만의 탄탄한 기획이 담긴 BX/패키지 프로젝트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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