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보험 회사에도 브랜드디자이너가 있어요?
필요할 때마다 외주 주는 게 저렴하지 않아요?
보험회사에서 브랜드디자이너로 일한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나조차도 입사 제안을 받고 고민하던 당시 보험회사의 디자이너라는 존재 자체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보험회사들이 내게 준 경험은 어땠지? 제작 관점이 다른 모바일 앱과 tvc는 제외하더라도, 보험 상품을 계약하고 만기 또는 해지할 때까지의 브랜드 경험을 떠올려보면 꽤나 별로였다.
일부러 읽기 힘들게 만든 것처럼 빽빽하고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서류들, 예쁘기는 커녕 집에 두고싶지 않은 보험회사 굿즈, 브랜드의 얼굴인 로고 사용은 또 어떤가. 일관된 시각 경험이란 보험회사에서 불가능한 명제인가 싶을 정도다. 게다가 계약기간 내에 보험금을 청구할 일이 생기지 않으면 만기까지 보험회사와 나 사이에는 이렇다할 접점이 없다.
넘쳐나는 브랜드 대홍수의 시대에도 대부분의 보험회사가 내게 준 브랜드 경험은 뾰족함이 없었다. 유명인 모델과 가격 경쟁에 의존하는 생존형 브랜딩 전략으로 보였다. 이것도 전략이므로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명인 모델은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에 효과적이고, 타사보다 저렴한 가격과 든든한 보장은 매출 상승에 기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유명인 모델 계약이 끝난다면? 타사에서 우리보다 더 좋은 보험 상품을 내놓는다면? 인지도와 고객 확보는 순식간에 불투명해진다. 특히 의무보험인 자동차보험의 경우, 갱신 주기가 1년으로 짧다. 1년동안 겪은 브랜드 경험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고객은 하루 아침에 타사의 자동차보험으로 갈아탄다.(갱신보다 갈아타는 게 저렴한 경우가 많다.)
결국 보험회사도 우리만의 매력으로 고객을 끌어당기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야한다. 고객을 만나는 모든 접점에서 일관된 브랜드 경험을 선물하고, 우리 브랜드를 선택하게 만드는 개성을 뾰족하게 다듬어야한다. 상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로서 존재하고 세상과 나누는 유기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보험회사가 브랜드로 거듭나기 위한 이런 목표들을 누가 꿈꾸고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 예상했겠지만 브랜드디자이너다! 물론 브랜드 경험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브랜드디자이너 혼자만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잠재 고객을 찾아 우리만의 언어로 말을 걸고, 고객을 넘어 팬으로 만드는 일은 브랜드디자이너가 가장 잘할 수 있다.
모든 디자이너는 기획자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결과물을 설계하는 기획자다. 이 과정에서 브랜드디자이너는 브랜드가 놓인 환경과 조건을 분석하고 상태를 진단한다. 브랜드의 비전을 보여주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전략을 디자인으로 구현한다.
브랜드에 생명을 불어넣고, 정체성을 만드는 데에는 브랜드디자이너의 거시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시간 단위로 돌아가는 일들, 눈앞에 닥친 문제 해결에 집중하다보면 브랜드의 방향성에 어긋나는 선택을 할 위험성이 있다. 조직의 규모가 클수록, 전문성으로 각자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을수록 더 그렇다. 완성된 전체 그림을 상상하며 흩어진 퍼즐을 끼워 맞추는 역할을 브랜드디자이너가 할 수 있다.
게다가 브랜드디자이너는 고객 경험의 디테일을 고민하기에 유리한 환경이다. 고객의 손끝에 닿는 감각적, 물리적 경험은 대부분 브랜드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니까. 손가락 한 마디만한 브랜드 로고를 통한 시각 경험부터 큰 규모의 공간 경험에 이르기까지 브랜드의 결과물을 기획-제작-관리할 수 있다. 게다가 외부 인력이 아닌 구성원으로 존재한다면 고객 경험의 디테일을 위한 고민의 깊이와 실현 가능성은 좀 더 뾰족할 수밖에 없다.
채용 공고에 ‘브랜드디자이너’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브랜드 운영에 필요한 시각 작업물을 만드는 직군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브랜드디자이너의 역할에 제약과 한계가 없어지고 있다. 앱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 경험부터 물성을 가진 제작물을 통한 오프라인 경험 그리고 조직 문화와 대외 커뮤니케이션 경험까지 브랜드디자이너가 다루는 영역은 계속 확장 중이다.
고객이 보험을 대할 때 말을 거는 상대가 보험회사가 아닌 브랜드로 느껴지는 순간을 위한 일. 유명인 모델 믿고 가장 저렴한 보험회사로 만기마다 갈아타는 게 아니라, 브랜드의 팬으로서 함께 나이들 수 있는 건강한 관계를 위한 일. 회사의 구성원들이 공통의 목표를 향할 수 있도록 한 방향으로 시선을 모아주는 일. 이 모든 일들을 위해 보험회사에 브랜드디자이너가 필요하다.
보험회사에 브랜드디자이너인 내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외주 디자이너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건 뭘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입사했다. 일하면서 꼭 나만의 답을 찾고 싶었는데 재직 1년이 넘어가면서 이제는 당당하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는 브랜드디자이너가 꼭 필요하다. 브랜드가 되길 꿈꾸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