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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선 Aug 27. 2021

#1. 오묘한 박탈감

직장생활 탄원서


소위 '취준생' 신분인 학인은 여느 때처럼 학교 도서관을 가기 위해 원룸 건물을 나섰다. 해가 쨍한 정오임에도 12월의 차가운 공기가 갑작스레 폐를 채우자 헛기침이 나왔다. 학인이 애용하는 길은 집에서 캠퍼스까지 동선이 가장 짧은 경로로 처음부터 끝까지 프랜차이즈 식당과 술집이 끊이질 않는 상권의 중심이었다

작년에 시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보행로를 넓히고 곳곳에 나무를 심고 깨진 보도블록을 교체하고 광장을 조성했다하지만 1년이 지난 시점에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가게마다 즐비한 음식물 쓰레기통에선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다. 은행나무 아래는 빈대떡 반죽 같은 토사물이, 연회색 보도블록엔 담배꽁초와 전단지가, 광장에 놓인 벤치엔 먹다 남긴 맥주 캔과 과자 부스러기 같은 쓰레기들이 구태여 들인 예산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가라는 곳은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칠수록 깨끗할 날이 없었고 학인은 한시라도 서둘러 생활 반경을 캠퍼스 주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올해로 30세인 그는 졸업유예로 수명을 연장시켜놓은 분명한 학생 신분이었음에도 자신이 더 이상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종종 늦게까지 자소서를 쓰고 귀가하는 날이면 술집 입구마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는 어린 청년들을 볼 수 있었다. 우연히 엿들은 그들의 대화 주제는 타깃으로 한 여자들과 어떻게든 그들을 꼬시려는 전략들이 주였는데 그 철없는 모습이 꼭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 같아 죄책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학인은 문득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떡볶이 가게 유리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174센티미터의 키의 평범하고 마른 남성이 회색 후드티와 연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곧은 머리에 하얀 피부, 남자치고 긴 속눈썹에 구슬 같이 동그란 눈. 아직 친구들에 비하면 동안이었지만 그건 그만큼 사회 진출이 늦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 버린 친구들은 이미 회사에 다닌 지 평균 3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학인도 꽤나 열심히 산 축에 속했지만 취준 기간이 늘어날수록 어쩐지 자신의 노력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취직이 되겠지.'


그는 여전히 가게 앞에 서 있었고 아주 잠깐 잘 다려진 정장에 서류가방을 들고 있을 미래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자괴감만 불러일으키는 괜한 짓이었다. 재빨리 생각을 지우고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불쑥 가게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인물이 나타나 그를 불러 세웠다.


"어? 학인아!"


브랜드 로고가 자수된 짙은 남색 모자를 쓰고 있는 남성의 이름은 한범수로 학인의 과 동기였다.


"범수? 야, 너 왜 거기서 나와? 아르바이트해?"


범수는 재작년까지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해 시험에 떨어진 후로 연락이 끊겼던 터였다. 학인은 내심 친구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에 동질감을 느꼈었다.


"이 나이에 알바는 무슨. 나 여기 인수했어. 오늘 오픈 날이야."


돌아오는 범수의 대답은 학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인수했다고? 너 공무원 시험 준비했었잖아? 그건 어쩌고?"


"아, 공무원 시험? 그거 잘 안됐지. 요즘 경쟁률 장난 아니야. 볼 때마다 한 두 문제 차이로 떨어지니까 돌아버리겠더라. 완전 희망고문이야. 그래서 붙는 거 기다릴 바에 그냥 빨리 돈이나 벌자 싶었지. 야, 담배나 한 대 필래? 육수에 불 올려놔서 아직 시간 좀 있어."


"아 그래? 잘됐네. 근데 나 담배 끊었다."


학인이 담배를 건네는 범수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범수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건물 옆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학인은 약간의 부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허연 연기를 뿜는 범수를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긴 학교 주변이라 권리금이랑 임대료도 비싸잖아?"


"비싼 편이지? 솔직히 아빠가 좀 보태주셨어. 공부할 때 운 좋게 주식으로 번 것도 있었고. 넌 주식 안 해?"


"와 아버지가? 진짜 학교에 조용한 알부자들이 많다는 말이 사실이었네. 주식도 할 돈이 있어야 하지."


"에이, 나도 엄청 소액으로 시작한 거야. 굴리다 보니 조금씩 커지더라고."


범수는 민망한지 곧바로 대화 주제를 바꿔 학인의 근황을 물었다.


"아무튼 너는 그럼 계속 취직 준비 중이겠네? 공기업 준비했었잖아."


"그렇지 뭐. 지금 한 군데 최종 결과 기다리고 있는데 잘 모르겠다."   


"오, 잘됐네! 어딘데?"


"아마 회사 이름 말해줘도 잘 모를 거야. '지역민생경제진흥원'이라고 몇몇 광역시에만 있는 작은 기관인데 여기도 일단 정년 보장되고 안정적이고 해서 써봤거든. 지금 심정으론 연봉이고 나발이고 빨리 됐으면 좋겠다. 어디든 써주기만 하면 노예가 될 수 있을 거 같다니까? 커피 타오라고 하면 매일 원두 그라인더로 갈아서 내려 드리고."


"아, 그 심정 내가 정말 잘 알지."


범수가 웃기다며 낄낄 거리는 동안 학인 역시 같이 웃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펐다.


 사람은 범수의 담뱃불이 꺼진 후에도 한참을 떠들었다. 주제는 주로 같이 수업을 들었던 동기들의 근황이었는데 공기업부터 은행, 그리고 대기업을 입사한 친구들도  많았다. 학인은 친구들의 성공이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편에 묘한 박탈감이 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범수는 가게 유리가 팔팔 끓은 육수로 인한 김으로 뿌옇게 됐을 때서야 허겁지겁 들어갔다. 학인도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좀 전의 대화가 계기로 어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발걸음을 재촉하지 못하고 갑자기 신경질이라도 난 듯 바닥에 나뒹구는 맥주 캔을 걷어찼다. 캠퍼스 입구까지 날아간 알루미늄 캔은 바닥에 부딪히면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영역표시라도 하듯 남은 액체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안 좋은 생각은 또 다른 부정적인 생각을 부른다고 했던가? 설상가상으로 학인은 일전에 고모부의 제안까지 떠올리고 말았다고모부는 폴리카보네이트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대표였는데 사무실 직원은  일곱  정도였지만 퇴사율이 높아 고민이 많았다. 할머니 제사로 오랜만에 큰집에 방문한 그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뜬금없이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눈이 높아서 취직을 못하는 거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고 사과를 먹고 있는 학인을 주시하며 현실을 직시할  알아야 한다고 어조를 높여 질타하기 시작했다. 학인은 고모부가 자신의 회사에서 내심 일을 하길 바라는 것도, 동시에 화풀이 대상으로 자신의 처지를 이용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모부의 생각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지금 젊은 사람들이 눈을 조금만 낮추면 '취업 문턱을 넘는 것' 그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루에도 채용 사이트에는 수백, 수천 건의 구인 공고가 업데이트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중에 절반은 턱없이 낮은 임금과 변변찮은 복지의 소기업들이었고 당연 취준생들은 지원하길 꺼렸다. 학인의 고모부가 운영하는 회사 역시 그런 부류  하나였다. 듣기로는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직원들 휴가도 못 쓰게 하면서 월급도 적었다.


“세금 떼고 190만 원이면 사회초년생치곤 괜찮게 받는 거라니까! 아, 어떻게 모든 청년들이 대기업 수준으로 1년에 몇 천만 원씩 받냐고. 안 그래?”


이런 오지랖 넓은 충고를 들을 때마다 학인의 마음속에는 강한 의문이 남았다. 분명 그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지 부딪혀봐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식의 도전정신 충만한 충고를 하던 어른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생계와 미래를 위한 중대한 결정의 기로 앞에 선 청년이 되자 '목표가 너무 높으니 눈을 낮춰라, 쓸데없는 자존심과 욕심을 버려라, 만족하는 법을 배워라' 따위의 충고를 늘어놓았다. 


'고작 그런 취급을 받으려고 다들 도서관에 박혀서 다년간 취준 생활을 하는 건 아닐 텐데.'


학인은 고모부의 말처럼 무조건 눈을 낮추는 것만이 낮은 취업률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방법이 옳다면 정부가 지원금까지 퍼줘 가면서까지 중소기업에 들여놓은 청년들이 매년 더 나은 둥지를 찾아 떠날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는데 어쩐지 발신처를 알 것 같았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예상이 맞다면 마침내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먼저 들뜨기보다는 최대한 자신의 예측으로부터 마음을 멀리 두고자 노력하며 심호흡을 했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김칫국을 들이켠 적이 몇 번이던가? 강한 확신은 더 큰 실망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학인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학인은 벌써 2년간 고배를 마셨고 이미 처음보단 상당히 현실과 타협한 상태였다. 학인은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의구심을 가졌다.


‘도대체 나는 뭐가 그렇게 모자라길래? 자소서에 문제가 있었나? 학점이 모자란 건가? 그래도 영어라면 좀 자신 있는데.’


그는 몇 개의 자격증과 살면서 겪은 다양한 경험들로 자신이 지닌 단점을 상쇄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었고 학인보다 뛰어난 경쟁자들은 수두룩했다. 희망은 접은지 오래였고 이제는 그 스스로도 정량적 평가로는 절대적으로 밀린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씁쓸해진 마음으로 울리는 전화기를 쥔 채 최근에 친 면접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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