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농사꾼의 바램-
"4월 안에 나오면 아들이고
5월이면 딸이야!"
임신한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나는 5월 2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딸이었다. 요즘에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지만 예전에는 성별에 대한 고지를 원칙적으로 금지했었다. 30년 전 남아선호 사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셨건 엄마는 개의치 않으셨고 최소한 집에서 만큼은 여자라고 여자라서 안된다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할아버지께서 이런 오해와 기대(?)를 했던 건 아마 엄마의 태몽이 한몫했을 것이다. 엄마는 지금도 태몽이 생생하다고 한다. 엄마에게 들은 나의 태몽은 이렇다.
1981년 어느 날들의 꿈
엄마는 밭으로 가 밤, 고추 등 농작물을 치마 가득 담는 꿈을 꾸었다. 그쯤 무렵부터 상당기간 어떤 날에는 치마에 알밤 가득, 어떤 날에는 빨간 고추, 파란 고추를 치마에 가득 담았다.
태몽으로 태아의 성별이나 장래의 운명을 풀이해 보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알밤, 고추 등이 일반적으로 상징하는 아들에 대한 바람을 가지셨다. 할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딸이었다. 그렇다면 이 태몽은 소히 말하는 개꿈이란 말인가.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아들은 아니지만 이 꿈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 의미가 없다면 스스로 의미를 붙여보자고 37년쯤 묵혀있는 꿈을 꺼내 보았다.
엄마가 치마에 가득 담아 태어난 나의 운명이란 무엇일까? 그때 꾸었던 그 꿈이 지금 내 생에 어떤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엄마는 충청도 시골에서 5명 이모와 1명의 삼촌, 나에겐 증조할머니인 엄마의 할머니까지 함께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다. 시골집에 대한 기억은 내게 꽤 남아 있다. 양쪽으로 밭만 있던 좁은 길을 지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있는 첫 번째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한쪽에는 한때 소가 지냈던 우리가 있다. 농부의 재산이었던 소는 농사일이 줄어드는 어느 해엔가부터 볼 수 없게 되었다. 작은 동네라도 몇 가구가 모여 사는데 마당에서 키우던 개는 우리 식구 차가 들어서면 기가 막히게 알고 짖어댔다. 푸세식 화장실이 오랫동안 있었고 부엌을 개조하기 전까지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먹었다. 이모들의 성화로 부엌 공사를 하고 한 뒤에도 작은 사랑방에는 아궁이가 남아 있었다. 어렸을 땐 그 아궁이에 나무를 넣어 불을 때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밤이 되면 정말이지 빛 한 점이 없었다. 너무너무 깜깜해서 눈을 감으나 뜨나 똑같았다. 그게 무섭고 신기해서 혼자 숨죽이고 깜빡이다 잠이 들었다.
시골은 엄마에게는 뿌리 같은 곳이고 내게는 이상향 같은 곳이었다. 엄마는 시골에서 전형적인 농부의 자녀로 태어나 자랐지만 서울로 올라와 공장을 다니며 결혼을 했고 나를 가졌다.
엄마는 도시에서 살기 시작했지만 꿈속에서는 뿌리 같은 곳, 고향으로 돌아갔다. 농부의 딸로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 도왔고 농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몇 달을 거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아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어야지만 수확이 가능한 게 농작물이다. 그 수확물을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많이 담을 수 있는 치마를 이용해 한껏 담았다. 편리한 도구를 이용한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옮겨 담은 것도 아니다. 온전히 엄마가 옮길 수 있는 만큼 가질 수 있는 만큼 품으로 담아 안았다. 그 옛날 행주대첩에서 행주치마로 여자들은 돌을 담아 날랐다. 넓적한 천을 둘러 입었지만 치마가 발휘하는 힘은 이렇게도 달라진다.
엄마는 내게 대지 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땀 흘린 만큼 알차고 탈 없이 잘 수확되길 바랬을 것이다. 자식 농사라는 말처럼 1년이 아닌 20년이 넘는 긴 농사를 지으셨다. 아직도 가끔 아이같이 엄마 치마폭에 쌓여 엄마 손에 담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엄마의 농사는 엄마가 눈 감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고된 서울살이로 엄마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마음만큼 키우지 못했고 나도 그렇게 살가운 작물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밭에서 작물로 키워진 나는 어떤 사람일까? 가을철 수확물처럼 알차고 탈 없는 사람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꿈을 내 성향으로도 본다면 어떨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게 하늘을 나는 용도 아니고 예쁘게 반짝이는 사과도 아니고 나는 밭에서 수확한 작물이다. 여러 밤들에 섞여, 여러 고추들에 섞여 있는 하나의 작물이다. 모아 놓아야만 있는 거 같고 하나 가지고는 딱히 무엇을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어울렁 더울렁 모여 태는 안 나지만 이리저리 섞여 때로는 알밤처럼, 때로는 고추처럼 살아가나 보다.
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우고 있던 가시를 벗겨 다시 한번 단단한 껍질을 까야만 알맹이가 나온다. 그제야 맨몸으로 같은 종족의 친구들과 부딪친다. 뻣뻣한 껍질마저 벗겨내야 제 역할을 한다. 따끈 달달한 군밤이 되고 요리의 예쁜 고명이 된다.
한국 요리에서 고추를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요리의 기본 재료이며 화끈한 맛을 내기도 하고 입맛을 다시게 할 예쁜 색을 내기도 한다. 고추 그대로의 형태로도 먹을 수 있지만 고추는 말리고 갈리고 장으로 담가졌을 때 더 깊은 맛을 낸다. 이렇게 들여다보니 밤과 고추의 삶이 길고 고난한 우리네 삶 같다.
가시를 뻗어 나를 보호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단단한 고동색 껍질을 벗겨내고 진짜 내 속살을 드러내야만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따가운 볕 아래서 바짝 말려 빻아 담겨 숙성을 거쳐야만 그 깊은 맛을 인정받을 수 있다.
시작부터 그랬다. 거친 땅에 작은 씨로 뿌려져 봄을 지나 여름을 견뎌 가을이 되야지만 거두어질 수 있다. 비바람을 지나고 바짝 마른 가뭄을 견디고 해충에게 일부를 내어주고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거둬지고 나서도 내 몫을 찾아 한참을 헤매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순서 없이 마법처럼 이동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느 과정에서는 생각보다 더 길게 머물러야 한다.
살면서 내가 맺었던 열매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것저것 흥미를 가지고 씨를 뿌렸다가 잊어버려 잡초에 파묻힌 싹, 진작 참새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 씨앗, 멋모르고 물만 들입다 부었다가 썩어버려 뽑아 저만치 던져 놓은 줄기들,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이리저리 치여 겨우 수확한 자잘한 열매도 있다. 회사를 나와 어설프게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돈도 좀 벌어보고, 수입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버티다가, 나 좋은 일 하겠다며 또 이렇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헤집는 나는 제멋대로의 농사꾼이었다.
태몽을 쓰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나를 막 가졌을 무렵으로부터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꿈은 여전히 엄마에게 생생히 남아 있고 나에게로 전해졌다. 엄마와 나 사이에 무형의 연결고리를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준 존재에 대한 감사와 원망(ㅎㅎ) 그리고 스스로의 삶의 농사꾼으로서의 시간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엄마의 태몽처럼 작은 씨앗으로 시작해 힘겹게 땅을 뚫고 올라와 계절의 시간을 지나, 자신의 열매 하나쯤 맺어 품으로 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제멋대로가 아닌 제대로 된 농사꾼! 온몸으로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새참도 먹고 시원한 비바람도 맞았다가 따가운 햇살에 아래 있는 진짜 농사꾼 말이다. 그리고 밤처럼 하얀 속내도 드러내고, 고추의 형태는 잃었지만 숙성되어 장처럼 깊은 맛을 낼 수 있기를. 나의 태몽이 그런 바람이 담긴 꿈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