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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집 이야기 Aug 12. 2016

나는 내가 궁금했다

-내향성 인간의 손가락 맞대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본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사회에서의 반응하는 나, 그리고 타고난 나는 내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그 차이를 알아 가고 나를 이해하는 게 재미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 대해 알고 싶었다.



20대에는 영화나 소설 속 인물들을 보며 나를 찾았다. 알 수 없는 방황의 원인과 공허감을 그들의 삶 어딘가에 있는 나와 유사한 부분을 통해 찾으려 했다. 그러나 순간의 공감과 위로만을 남기고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였고, 영화의 크레은 올라갔다.


그 후에는 이런저런 심리 관련 책들을 찾아 읽었다.  

나와 비슷한 사례나 감정들을 보며 부모원망하고 탓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부모 또한 처음 부모라는 역할을 맡은 너무나 불안정하고 나약한 보통 사람이라는 걸 알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걸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름이 알려진 성격유형 검사들도 받았다. MBTI에서는 INFP 일명 잔다르크형 이었으며, 애니어그램에서는 4번과 9번 유형, WPI에서는 M자형의 아이디얼리스트였다.


이런 검사들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데 일부 도움이 됐다. 내가 알게 된 나는 너무나도 내향적인 인간이었다. 내가 에너지를 채우는 순간은 혼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나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할 때 가장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를 표현하는 방법보다는 숨기고 뒤돌아서는 방법에 더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속으로 생각을 다듬으며 혼자만의 엉뚱한 상상을 즐겨했다.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지만 대부분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장면에 배경에 캐릭터를 얹어주는 것이었.


내 방식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어떠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억지로 쥐어짜 낸 스토리는 순간뿐이고 이어나가질 못했다. 흥미는 금방 떨어지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만 남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꿈은 언제나 나를 위해서 찾아온다는데 멋진 예술가들이 꿈에서 만났다는 영감이 내게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멋지게 그림을 그려보겠노라 다짐했지만 정작 몇 개 그리다 보면 내가 왜 이것을 그리고 있는지 모를 공허감뿐이었다. 맥락 없이 컨텐츠만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몇 장의 그림을 내놓으며 나는 내 감정은 그대로 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숨길수 없는 곳이 있었다. 그건 내 꿈속 이었다. 지난밤에 꾼 꿈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내 꿈을 속일 수가 없었다.  꿈속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나는 괜찮았던 일에 분노했고, 내가 외면했던 잠재력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꾼 꿈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그 무렵 나에게 찾아온 꿈이 있다.


어느 교실에 나는 대학 친구 오양과 앉아 있다. 내 옆에 앉아있던 교수는 내가 너무나 소극적이라며 나에게 대놓고 충고를 한다. 내가 인사를 할 때도 작은 목소리로 너무나 자신 없게 말한다며 과장되게 내 흉내를 낸다.


나는 기분이 무척 상해 교수에게 따진다.  그렇게까지 인사한 적도 없으며 내향적인 것이 나쁜 것은 아니고, 이것도 내 성격이고 이런 성격으로 일을 하는 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한다. 교수는 내 의견에 전혀 수긍하지 않으며 이런 식의 소통은 더 이상 안된다며 내게 두 번째 손가락을 내민다. 나도 손가락을 내밀고 두 개의 손가락은 맞닿는다. 딱 영화 이티의 한 장면이다. 그 순간 갑자기 교수는 자신의 바지 속에 손을 넣어 성기를 꺼내려한다. 교실에 있던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경악하며 소리를 지르고 교실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대학 친구 오양은 나보다 더 내향적인 친구이다. 꿈은 이 친구를 등장시킴으로써 내 내향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런 친구와 한 교실 안에서 나는 교수에게 나의 태도에 관해 지적을 받는다. 실제의 나라면 이런 교수의 충고에 웃어넘기는 척하거나 가볍게 받아들이는 뉘앙스를 풍기고 뒤돌아 마음 상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꿈속의 나는 내 성향에 대해 당당히 교수에게 이야기한다. 내향적인 성격이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성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름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수는 지속적으로 나에게 소통을 해야 한다며 내게 손가락을 내민다.


꿈은 왜 하필 손가락을 맞닿은 장면을 내게 보여주었을까? 손가락이 맞닿는 장면은 영화 이티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생기를 부여함으로써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게 한다. 생기를 부여받는 장면을 미켈란젤로는 손가락 끝과 끝이 만나는 순간으로 표현한다. 이제 곧 인간은 창조주인 신으로부터 손가락 끝을 통해 생기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티에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서로의 손가락을 맞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존재인 외계인과 소년의 깊이 있는 소통을 상징한다.



내가 내 이야기를 글로 써내려 가는 것은 내게 창조의 시작이며 소통의 방식이다. 그 소통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 안의 신에게 생기를 부여받은 것이고, 서로 다른 존재가 내 안에서 밖으로 소통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모두 내적으로 양성적인 존재다 여자인 내 안에도 남성이 있다. 그리고 내 안의 남성성이 제대로 발휘될 때 나는 온전한 하나의 인간이 되어 간다. 남교수는 내가 가진 남성성의 일부일 것이다. 아직 배움의 장소인 학교의 교실 안에서 나는 교수에게 소통에 대해 배운다. 내 성향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대학생 정도의 수준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표현하라는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진정한 내 남성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교수가 꺼내려한 성기는 남성적인 에너지의 상징이다. 내 남성성은 이제 자신의 힘을 보여줄 준비가 된 것이다.


내가 글을 쓰고 이것을 다른 이들과 소통하려고 마음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표현하지 않은 낯설고 놀라운 에너지다. 당장 이 교실에서 뛰쳐나가버리고 싶을 만큼!


나는 나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것은 내 안의 다른 부분을 일깨우는 중요한 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난생처음 이렇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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