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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Aug 09.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25

길을 벗어나다

23일째다. 길을 잘못 접어들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아침에 정상을 향해 올라가서 내리 내리막길이다. 갈리시아로 접어드니 까미노 표지석도 바뀌고 길도 신경 써서 만든 테가 확실히 난다.


점심시간 이후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다. 갈림길에서 표지석을 보지 못하고 내리막을 따라 털레털레 걸어가는데 뒤에서 엔진 소리가 들린다. 길 한편으로 비켜서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엔진 소리가 작아지더니 내 옆에 서서 창문을 내린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저기 위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접어들었어. 다시 올라가서 왼쪽으로 가라고!” 만국 공통인 바디 랭귀지로.. 나는 Muchas Grasias라고 스페인어로 대답했다. 이번 트레킹에서는 할아버지들 도움을 여러 번 받는다. 갈림길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지팡이로 손가락으로 길을 가르쳐 주는 할아버지를 여럿 만났다.

여기서 아래 까미노 방향 표지석을 보지 못하고 로드리게즈 알베르게 표시를 보고 하염없이 내려가다.


여섯 시가 다가오는데 마을은 아직 2킬로나 남았고 마을로 간들 알베르게가 없다는 걸 앱으로 알게 되었다. 어쩔까 하는데 La casa del Alquimista라는 표지가 보이고 미술품을 전시한다고도 쓰여있다. 일단 물도 마시고 그늘에서 좀 쉬어야 해서 찾아갔다.


돌가루로 작품을 하는 작가가 사는 곳인데 자원봉사하는 친구들이 둘 있다. 명상하는 공간도 있고 손님을 환대하는 분위기다. 작품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물과 과일을 먹으라고 내어주고는 말을 건다.


빈 방이 있던데 어떤 용도냐고 물었더니 순례자들이 묵을 수 있단다. 대신 저녁과 베드 비용으로 최소 10유로는 내고 그 이상은 도네이션이란다. 묵을 거냐고 묻길래 일단 명상을 좀 하고 답을 주겠다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갈 곳도 없고 다리도 아픈데.. 하여간 명상하러 들어가서 일단 스트레칭부터 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편안하다.



저녁 만드는 걸 거들고 시에스타에서 깨어난 작가 하고도 통성명하고 작가 만나러 온 커플 하고도 인사하고 같이 저녁 먹고 설거지 당번 정하는 게임도 하고 함께 풀밭에 둘러앉아 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알베르게가 아니니 순례자 여권에 크레덴셜(방문 증명 도장; 산티아고 도착하면 이들 도장을 근거로 완주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뭐가 대수랴! 내가 걸은 게 중요하지 증명서 쪼가리 받자고 여길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 길은 다시 나뉜다. 내일 아침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며칠 뭉개며 게으름을 피울 것인가?

20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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