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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Aug 06.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24

순례자 메뉴

순전히 순례자 메뉴에 따라 나온 와인탔이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프렌치 카미노의 세 봉우리 중 마지막을 오늘 넘으려고 했으나 30킬로미터를 걷고 난 이후라 도저히 걸음이 앞으로 나가지 않느다. 산정을 4킬로 앞두고 다행히 마을이 있어 오늘은 여기에서 머물기로 하다. 어제와 같이 성당 옆에 붙어 있는 공립 알베르게인데 벽이 두텁다. 시원함이 두터운 벽이 있어 가능하다.



늘 그렇듯 빨래해서 널고 동네에 하나 있는 구멍가게 가서 맥주 한 캔 사서 홀짝인다. 조용해서 좋다. 산 중턱에 넓게 조성된 초지를 보며 찬 맥주를 마시는데 아무 생각 없다.


막바지에 다다르니 하루 주행거리가 비슷한 순례자들을 같은 동네에서 자주 마주친다. 오늘 알베르게 옆 벙커에는 아침 출발할 때 증명사진 찍어준 폴란드 출신 연세가 좀 있으신 레이디이고, 동네 채식메뉴 식당 앞에선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던 알베르게에서 만난 두상이 예쁜 마드모아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채식주의자를 순례객 중에 흔히 만난다. 길을 걸으며 도로 표지판 STOP사인 밑에 ‘Eating Meat’라는 글을 심심치 않게 본다. 나보고 채식 메뉴를 찾아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고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엷은 웃음이 지나간다. 목덜미며 쇄골 근처가 울긋불긋하다. 베드 버그의 습격에 당했나 보다. 나도 초기에 오른쪽 아킬레스 근처에 두 군데 물려봐서 그 괴로움을 안다. 가려움을 완화시켜줄 약이 있느냐 했더니 다음 마을에서 구해볼 거라 한다. 이 또한 이 여정의 일부분이란다. 그녀는 이제 19살인데 꽤 깊은 사고의 경지 해 도달했나 보다. 어제 여기까지 쓰고 와인에 취해 잠이 들었다. 꼭지를 순례자 메뉴로 하고 뭔가 이야기하려 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깨끗하다.


You only fail when you stop trying.
어제 식당에 씌어 있던 글이다.
새로운 시도를 주저앉히려는 논리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내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지만은 않으리..


오늘의 사족 1. 거리가 큰 의미가 있으랴마는 걸어온 길보다 남은 길이 짧다. 삶도 그러하다.

2. 까미노 노상에서 두 번째 보는 한식 메뉴이다. 첫 번째 본 곳은 하루 쉰다고 해서 지나쳤고 두 번째 만난 식당은 30분 기다려야 문을 연다고 해서 다시 패스.. 두 번째는 좀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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