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플리스가 즐비한 발렌시아 해변에서
지난여름 탈코르셋으로 가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난 옷차림을 파리에서 자주 접하고선 미술관, 박물관 갈 때마다 가슴이 드러난 조각과 그림을 유난히 열심을 내어 보며 다녔다. 하지만 그 정도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갔더랬다.
까미노 순례 중에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가 까미노 마치면 무얼 또는 어딜 갈 거냐였다. 애초에는 몸 상태를 보고 피니스테레(또는 피스테레; Finisterre, 땅끝 마을)까지 갔다가 포르투로 걷는 여정을 이어갈까 했었다. 그런데 까미노 마지날이 되기 전에 신호가 왔다. 이젠 그만 걸어도 되겠다. 휴가는 아직 남았고 다음 여정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안달루시아로 향하려 여러 교통수단을 검색했는데 마땅한 것이 없다. 산티아고에서 이틀 동안 예약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 그리하여 휴가 마지막에 들렀다 파리로 돌아가려 했던 발렌시아 친구에게 연락했다. 돌아온 답은 언제 와도 환영.. 그리하여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빨리 발렌시아로 가게 되었다.
트레킹화를 작년 여름에 사서 몽블랑 일주일, 돌로미테 일주일 그리고 이번 까미노 한 달 그렇게 걷고 났더니 밑창이 다 달았다. 발렌시아까지 함께 왔으나 이젠 샌들이면 충분하여 미련 없이 버렸다.
에어컨이 나오는 복층구조 아파트의 위층을 나에게 내어준 친구와 넓은 발코니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이게 어찌 된 조화인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까미노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나의 대답은 발렌시아에 친구를 만나러 갈 거라고 답했고, 그때마다 도보여행 후 해변의 휴식이 최고라며 엄지를 추켜세우는 순례자들이 많았다.
유명한 휴양지인 탓에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유난히 많고 또 가족들 친구들 함께 온 팀들도 즐비하다. 오늘 토플리스가 사방에 돌아다녀 비키니를 입은 씨뇨리따가 오히려 어색해 보이는 발렌시아 해변에서 다시 생각한다.
옷 입는 스타일이 다른 건 당연지사이니 같은 팀에서도 토플리스인 사람 비키니를 입은 사람 각자 취향대로이다. 발렌시아 해변은 넓고 길다. 명사십리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했다. 나는 이제까지 보았던 영화, 잡지, 동영상의 모든 가슴보다 더 많은 가슴을 오늘 보았다. 밝고 밝은 태양 아래 백사장에서, 발가락이 훤히 드려다 보이는 바다에서, 끝없이 줄지어 서 있는 파라솔 아래 선베드에서 해방된 수많은 가슴을 보며 생각한다.
이젠 머릿속에 관념으로 남아 있던 그리운 가슴과는 이별해도 되겠구나. 코르셋으로 감춰져 있던 그리하여 다른 이에겐 드러내면 안 된다는 의식의 빗장 안에 갇혀 있던 나의 사고 안의 가슴을 해방시킨다. 앞으론 탈코르셋을 거리에서 만나도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으리라.
휴가가 닷새 남았으나 오늘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 수 없이 다녔던 출근길과 동네 골목길, 참새 방앗간 들리듯 주말마다 갔던 박물관 안 카페 가는 길을 다시 걸으며 지난 이 년간 파리의 걷기와 해방된 가슴을 다시 생각해 볼 참이다.
2019.8.10.
오늘의 사족 1. 발렌시아 해변에서 든 다른 생각, 왜 시뇨르는 벗은 자가 없나?
2. 증명사진을 남기지 못하였다.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