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위 Sep 15. 2020

우리 안의 선과 악

2020년 5월 17일 하늘 뜻 펴기

오늘은 2020년 5월 17일입니다. 내일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향린공동체 네 교회는 우리나라 민주화에 결정적 사건이자 현대사의 큰 아픔인 이 날을 맞이하여 현장예배를 드리고자 계획하였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모이는 현장예배를 비롯한 모든 모임을 취소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오늘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온라인 예배를 순발력 있게 기획하여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있음을 저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더불어 매주 헌신적인 노력으로 비대면 예배 준비에 정성을 기울이는 우리 교우들께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배팀으로부터 하늘 뜻 펴기 섭외를 2주 전에 받았을 때 저는 순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선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생각해보니 518 광주 민중항쟁 40주년 기념주일의 하늘 뜻 펴기였습니다.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주제로 해야 될지 생각하며 본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며칠 동안 생각이 맴돌기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몇 해전에 읽었던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떠올랐습니다. 르포에 가까운 이 소설을 잡은 순간부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끝까지 읽었던 그때의 느낌이 떠 올랐습니다. 이번 주에는 여섯 개의 챕터와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이 책을 하루에 한 챕터씩 천천히 다시 읽으며 중간중간 표시를 하였습니다.

오늘 하늘 뜻 펴기는 비록 우리의 몸이 물리적으로 망월동 민주화 묘역에는 가지 못하였지만 그날을 기념하는 의미로 소년이 온다의 부분 부분과 오늘 주어진 성경 말씀과 번갈아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1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다음은 한강씨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 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꿈 때문이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을 피해 나는 달아났다. 숨이 턱에 받쳐 뜀박질이 느려졌다. 그들 중 하나가 내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올려다보는 순간 군인이 총검으로 내 가슴을, 정확히 명치 가운데를 찔렀다. 새벽 두 시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명치를 짚었다. 오분 가까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덜덜 턱이 떨렸다. 울고 있었던 줄도 몰랐는데, 얼굴을 문지르자 손이 흠뻑 젖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518과 관련된 자료를 모을 수 있을 때까지 모아서 읽고 한강씨는 죽은 자와 산자를 이어주는 영매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까 읽었던 요한복음의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라는 문장이 함께 겹쳐졌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14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에필로그에는 소설에서 소년으로 나오는 동호의 형으로 짐작되는 분의 인터뷰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사실 고민했습니다. 나는 할 말도 없는데 만나면 뭐하나. 그러다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니까.. 그럼요. 어머니가 계셨다면 망설이지 않고 만났을 겁니다. 놔주지도 않고 끝없이 동호 이야기를 했겠지요. 삼십 년 동안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베드로전서 3장

15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항쟁 기간 중학생 동호가 전남도청에서 한 역할 이야기입니다.

동호가 기록한 인적사항들을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이면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 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동호는 흰 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신원이 확인되면 멀찍이 물러서서 오열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너무 험하지 않게 대강 수습해 놓은 시신을 유족들은 목화솜으로 코와 귀를 막아주고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렇게 간단한 염과 입관을 마친 주검이 상무관으로 옮겨지는 걸 장부에 기록하는 것까지가 동호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소년이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받듯이 펴고..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베드로전서 3장

16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호네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던 동호와 단짝 친구였던 정대와 공부를 더하고 싶었던 정대 누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미소가 지어지던 유일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이미 죽어 시신이 된 정대의 일인칭 시점으로 기술된 부분입니다.

그날 밤 난 홑이불을 배에 감고 누워 일찍 잠든 척하고 있었지. 언제나처럼 야근을 하고 들어온 누나가, 언제나처럼 세면장에 상을 펴고 식은 밥을 찬물에 말아먹는 소리가 들렸어. 씻고 이를 닦은 누나가 발 뒤꿈치를 들고 들어와 창문으로 다가가는 옆모습을, 난 어둠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봤어. 모기향이 잘 타고 있는지 확인하려던 누나는, 내가 창틀에 세워놓은 칠판지우개를 발견하고 웃었어. 한숨처럼 낮게 한번, 잠시 뒤 소리 내어 한번 더. 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헝겊 지우개를 한번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았지. 언제나처럼 나에게서 멀리 이불을 펴고 누웠다가, 가만가만 무릎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지. 잠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나는 정말로 눈을 꼭 감았지. 누나가 내 이마를 한 번, 뺨을 한 번 쓰다듬곤 이부자리로 돌아갔어. 좀 전에 들렸던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다시 들렸어. 한숨처럼 낮게 한번, 잠시 뒤 소리 내어 한번 더. 캄캄한 이 덤불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베드로전서

1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어지는 시신이 된 동호의 독백입니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 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 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요한복음 14장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 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 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 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베드로전서 3장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 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 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 씩 죽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 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 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졌다고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 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 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작가는 에필로그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함께 남겨둡니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 부대원이 있었다. 집단 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도 오래전 지리산 산행할 때 광주항쟁 당시 진압군으로 갔었던 분을 만난 적 있습니다. 떨리던 손으로 담배를 피우던 그 손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7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달은 밤의 눈동자라고 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5장은 당시 벌어졌던 혹독한 고문에 대한 내용입니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 방법은 없다. 이 부분은 차마 더 이상 옮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돌아갈 길이 끊어져버린 그 참혹한 곳에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 안에 계신다는 말씀이 전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요한복음 14장

18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호의 어머니 이야기가 마지막에 나옵니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싸놓은 내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작가의 에필로그 마지막 문장도 함께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 불을 붙였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소리 없이 일렁이며 주황빛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 차츰 우묵해졌다.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한복음 14장

20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지나고 나면 5.18 망월동 묘역과 4.19 묘지와 4.3 항쟁의 기억과 세월호 아이들이 있는 곳과 용산참사가 벌어진 곳과 한반도 곳곳 생채기가 나고 그리고 아물고 또 꽃이 피어난 곳들을 찾아다니며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을 찾아야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찾아다니지 않아도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는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찾고자 한다면..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덧 붙이는 글 1. 어떻게 시작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못하여 몇 일을 끙끙 앓다가 토요일 밤에서야 성서 본문과 한강씨의 글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써 내려갔다. 원고를 쓸때는 무덤덤 하였다.

2. 온라인으로 교우와의 직접 대면 없이 모니터를 마주하고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데 글자가 발화(發話)하여 소리가 되어 나오는 순간 감정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 어떻게 마쳤는지 아득하다.

3. 내밀한 원고를 공개하기가 망설여졌다. 얼마전 공당의 대표가 518묘역에서 눈물 흘렸다는 뉴스를 듣고 이 원고가 떠오랐다. "소년이 온다"를 그와 그가 속한 당의 의원들은 읽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Camino 에필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