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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0. 2019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Pros and Cons of Being a Parisien_03

삶이 어디 뜻대로 되더냐?
낯선 사람, 낯선 직장, 회사 밖을 나서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난무하는 새로운 환경..
애당초 이런 조건에 적응하려면 한국에서의 생활방식은 버리는 것이 마땅하였다. 유심칩을 바꾸고 새로운 앱들을 깔고 이방인으로 파리살이를 준비를 하는 과정에 작위와 부작위가 섞이면서 단체 카톡방과 밴드 모임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별하게 되었다.
크로노스하게 즉 chronological 하게 글을 올리려 생각했었다. 그동안 멀어져 있었던 시간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열 달이다. 이미 10개월 전의 나는 세월 속으로 사라졌지만, 기억 속에 우리는 그 상태에 여전히 머물러 있기에 통시적으로 글을 올리는 것이 오해를 줄이고 이해를 넓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합리적인 것이 무엇일까? 위에 두 아이를 불어만 쓰는 빠리의 공립 중학교(비록 적응반이기는 하지만)에 보내고 온 첫날 하루 종일 서성거렸다. 반을 옮겨 다니며 수업을 들어야 하는 접해보지 못한 수업방식인데 어디로 갈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는 큰 애한테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다음 수업이 무엇이냐 물어온 프랑스 아이가 있었단다. 이름이 Raphael이다. 대천사 라파엘이 강림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그렇게 친구가 생기고 지난봄 그라나다로 떠난 수학여행 때는 한방을 같이 쓰는 친구가 되었다.
몇 차례 선생님들과 면담을 하였다. 고등학교 진학이 주된 논의 내용이다. 불어로 진행될 문학과 수학 과학 역사 사회 등의 학습량과 부담을 감안하면 고등학교로 꼭 진학할지 말지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하자는 것이 주된 요지이다. 6개월째 까지는 이런 기조가 강하였다. 하지만 늘 항상 여지를 두었다. 아이들의 언어 능력은 어느 순간 점프할 수 있으니 가능성은 열어 두자고.. 9개월을 지켜본 후 진학을 시키자고 한다. 그동안 가장 많이 선생님과 이야기했던 것이 어느 정도의 학습이 그리고 어떤 또래 집단에 소속하는 것이 아이의 삶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였다.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불합리 가운데에서도 이것만큼의 합리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계획이 틀어지는 건 늘 순간이다. 시간 순으로 빠리 생활과 감상을 나열해서 그동안의 인식을 간극을 극복하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퇴근 무렵 메시지 창이 뜨면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Les enfants de la Resistance


큰 아이가 오늘 도서관으로 따로 호출이 되었단다. 잠시 이건 무슨 일이지.. 오만 생각이 교차하는 과정에 바로 다음 문자가 왔다. 상을 받았단다. 비록 A4용지 반장에 인쇄한 너풀거리는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애 많이 썼다는 내용의 상장과 함께 받아온 책(실은 만화다)이 ‘레지스땅스의 아이들’이다.
연대기로 글을 옮기려던 나의 계획은 이로써 틀어지게 되었다. 연속적이고 정량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설명할 일이 아니구나. 목적과 의식이 개입한 카이로스 즉 결정적 순간을 놓치면 안 되겠구나 하며 지금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이방인으로 시작한 중학교 마지막 학년의 성적은 평균을 오가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 상은 이전보다 나아진 그리고 그동안 책상에 붙어 앉아 따라 잡기 위해 발버둥 하였던 그 시간에 대한 보답이 아닌가 한다. 그 수많은 시간 함께 해 주었던 여러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나의 친구 나리메의 소개로 빠리 정착의 은인이었던 이도 그중 하나다. 매주 한 번씩 집으로 와서 큰 아이와 함께 프랑스어 공부를 한다.
집에 오는 길에 샴페인 한 병을 사들고 왔다. 오늘 같은 날 어찌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있으리오.


축배


집에 오니 위에 두 아이는 여전히 단어를 들고 씨름하고 있고 막내는 친구 집에 놀러 가고 없다.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는 학교생활이 즐겁다. 역시 적응반에 있기는 하지만 막내가 사귄 한 살 많은 크로아티아 친구와는 슬립오버를 하며 하하호호 밤새 수다가 끊이질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그렇게 카이로스의 시간이 오는가 보다..

오늘의 사족 1.: 신학 전공한 친구들이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글이다. 내 허접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인식이 겸연쩍네..

2. 이 글은 2018년 그러니 파견 온지 1년쯤 지난 시점에 쓴 글이다. 아이들 모두 파리의 공립학교 2년 동안의 공부를 무사히 마치다. 큰 아이는 B2 시험을(영어로 치면 토플에 해당하는), 막내는 A2 시험을 통과하다. 둘째는 이도저도 싫다 하여 불어 자격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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