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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0. 2019

시모트라케

Pros and Cons of Being a Parisien_04

날개, 날개를 보고 싶었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유홍준 선생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딱 아는 만큼 눈에 들어온다. 다만 안다는 걸 어디까지 정의하느냐에 따라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앎이 지식만을 뜻하진 않겠지..

8월 1일, 그날은 무척 더웠다. 일기를 보니 낮 햇살에는 걷기 힘들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저녁에 루브르 다녀오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앞에서 한참 앉아 있다 오다라고 적혀 있다.


식구들이 방학 맞아 서울로 갔고 열흘 전에 몽블랑 트레킹을 다녀와 마음은 여전히 스노우캡을 쓰고 있는 산자락 어디메를 어슬렁거릴 때였다. 몽블랑에서 마지막 밤 숙소는 본 옴므(좋은 사람) 산장이었는데 이 산장 오는 고갯길이 프랑스-이탈리아 경계인 Col de Four인데 2500미터 정도 된다. 한여름이지만 트레킹 코스 주변엔 빙하가 남아 있고 고갯마루에 사정없이 부는 바람은 윈드브레이커를 꺼내 입게 만든다. 비니를 쓰고도 추위에 떨며 걸음 옮기기도 힘든 상황이 이어진다. 여기서 하늘 높이 떠 있는 수리들을 보았다.





일하는 OECD 경내엔 널찍하고 관리가 잘된 잔디밭이 있다. 여기 터줏대감은 까마귀 3형제이다. 물론 그들의 성별을 확인할 수 없다. 그냥 3형제라 하자. 산책 나오면 사나흘에 한 번은 만나는 것 같다. 오늘 그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무슨 이유에 선지 날개를 펴고 누워 있다. 엎드려 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인가? 하여간에 날개를 잔디밭 위에 펼쳐놓고 가만히 있는다.





그날 저녁 루브르로 향하였다. 수요일과 금요일은 저녁 늦은 시간까지 박물관 문을 연다. 시모트라케의 니케는 박물관의 백미다. 드농관과 설리관이 이어지는 1층 그러니까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그라운드 플로어 0층에서 1층을 올라가는 계단에 위치해 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니케 상이 가지는 힘과 권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니케를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오늘 계단 올르며  그녀를 보는 순간 다른 곳은 포기다. 두 시간 내내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정면에서 멀리서 가까이서.. 다른 이유가 딱히 생각나진 않는다. 이 글을 쓸 때까지도 잔디밭에 날개를 펼치고 있던 까마귀를 보았던 날이 니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날과 같은 날인 줄 몰랐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그날이 같은 날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낮에 까마귀 날개를 보았다고 그게 의식의 저편에 남아서 니케의 날개를 바라보게 하였다는 논리는 무언가 좀 비약이 심하다. 허나 어쩌랴 나는 니케를 보기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는 몽블랑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수리와 잔디밭에 날개를 펼쳐놓은 까마귀 밖엔 없는 걸..

어디론가 날고 싶나? 어쩐지 며칠 전부터 겨 아래가 가렵더니…

#시모트라케


오늘의 사족 1. 시모트라케는 앞으로 더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해시태그를 붙이다.
2. 사실 지난 금요일 밤에도 시모트라케 앞에 한참 앉아 있으며 어부인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잊고 있던 글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때 떠올랐던 이야기는 하나도 쓰지 못했다.
3. 가을 감기가 약하게 들었는데 감기 기운이 몸 밖으로 나가질 않는다. 루브르 갈 때는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는데 날개 덕분인지 올 때는 가볍게 왔다. 너무 주술적인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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