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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0. 2019

겨울을 같이 난다는 것은?

Pros and Cons of Being a Parisien_08

빠리 구청의 결혼식과 낙엽 바라보기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였다이유를   없는 무력감과 피로로 당연히 감각은 둔해지고 공감하는 부분도 적다글머리나 글감이 떠오를 리 없다글이 신탁으로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지극히 사회적 소산임에 분명하다면 무엇이든 간에 누구이든 간에 교감하여야 글이 씌어지는  당연할 터이니 둔감해진 촉수에 글의 정령이 걸려들리 만무하다.

겨울을 같이 난다는 것은?
김영하 작가가 그리스 여행 프로그램에서 지중해의 겨울을 같이 난 사람이 아니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우리 식구 모두 그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파리의 어둡고 습하고 우울한 겨울을 같이 난 사람이 아니라면 진정 인생의 동반자라 할 수 없으리라고 입을 모았다. 허나 요즘 작년과 달리 늦가을 이미 우울모드가 시작되어야 할 시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상머리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할 만큼 좋은 날이 계속된다.

주례사로 어린 왕자를..
오전에 16구 구청에서 열린 혼인예식 아니 엄밀히 말해 결혼이라는 행정절차에 참여하고 왔다. ‘귀한 걸음 하시어 따뜻한 마음으로 축복해 주시면 더 없는 기쁨이 되겠다’는 청첩장을 받고 어찌 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있으리오! 구청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공간에서 열리는 식은 결혼에 필요한 행정적 절차를 실용적이고 간소하게 그리고 신부와 신랑이 부담가지 않도록 정해놓았다. 당사자를 하객들 앞에 벌세우듯 불러 세워서 하는 식순도 없다. 짧은 시간이지만 모두 청중석에 앉아서 진행한다. 식을 주관하는 공무원도 지켜보는 하객도 편안하다. 과정을 주관하는 부시장이 오늘 같은 날 즐겁게 즐겨야 될 시간이 중요하니 길게 말하는 건 옳지 않다며 짧게 한마디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한 말을 한마디 인용하고 주례사를 가름한다. 식 중간 결혼 문서에 신부와 신랑 그리고 증인들이 차례로 나와 서명한다. 이로써 행정 절차임이 분명해졌다.

영웅 천하의 시작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오전에 결혼식도 다녀오고 해서 오후엔 사무실에 좀 붙어 있으려 했는데 문자가 왔다. 막내 데리러 학교 앞에 왔는데 시간을 잘못 보고 나왔단다. 즉시 손가락이 응답했다. ‘이리로 오시오’ 내용보다 속도가 중요한 게 인생살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 경험칙이다. 그리하여 예정에 없던 공원 산책을 나왔는데.. 가을 햇살은 부드럽기 그지없고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는 모양새가 장만옥과 장쯔이가 검무를 추던 영웅의 미장센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장가를 막 들고 두어 달 만에 회사를 집어치우고 공부하러 가겠다며 토플과 GRE 책에 코를 박고 살던 시절이었다. 어부인 출근하고 단어를 외우다 지겨웠는지 동네 극장에서 영웅을 보았다. 앉은자리에서 내리 두 번을 보았다. 오늘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공원 벤치에 앉아 영웅 주인공의 색깔별 테마에 대해, 날씨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대해, 불어 실력이 늘어 학교 수업시간에 시험을 보면 꽤나 성적이 나오게 되면서 애들이 보이는 태도의 변화와 이를 인간의 간사함으로 표현하는 둘째의 사고체계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겨울에 대해 이야기한다. 늦가을 우연히 찾아온 벤치에서 햇살과 바람과 흩날리는 낙엽 속에서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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