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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7.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03

토플리스를 만날 줄이야...

어제 백석의 시구절 중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가 맴돈다.
오늘 아침 길을 나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길에 어제저녁 식사 때 앞에 앉았던 브라질 부부가 저 멀리 고개 마루에 있길래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다.
고갯마루에 서 있는 성모상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난 그런 적이 없었는데 자연스레 전화기를 내밀고 “I wanna take a picture with Mother Mary”라고 말했다.


기실 어제저녁을 먹으며 이들 부부와 상당한 양의 썰을 풀었다. 까미노 베테랑인 이들 부부는 이미 여러 차례 순례의 경험이 있고 이번에도 아라곤 코스를 마치고 프렌치 루트의 절경만을 골라서 스쳐 지나는 중이었다. 당연히 피레네 산맥 코스는 이들 부부에겐 빼놓을 수 없는 구간이다. 덕분에 10년 전 제주 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까미노 답사기부터 그녀가 이루어 온 올레 열풍과 한국인이 유독 까미노에 많은 이유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들은 오늘 피레네 산맥 코스를 마치고 차로 이동하여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아직 내가 꿈꾸고 있는 DMZ 평화올레, 도보다리 산책과 같은 2부 썰을 더 풀어야 하는데..



오늘은 어떤 시를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 아차차 아무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하면서 떠오른 시가 권정생 선생님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이 떠올랐다. 백창욱 선생이 곡을 붙여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이라는 곡으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나도 백창욱 선생의 노래로 이 시를 접하게 되었다. 낭독은 처음이다. 읽는데만 10분이 너머 걸리는 긴 시다. 긴 말은 생략하고 눈으로 보는 시와 읽는 시는 그 간극이 하늘과 땅이다. 연주되지 않는 악보가 우리에겐 무명인 것과 진배없다.


어디서 시를 녹음할 것인가를 찾다 오늘 30킬로 가까이 걸으며 겨우 도착하기 5킬로를 앞두고 피레네 산맥에서 내려오는 맑은 개울가를 만나 좌정하고 앉았다. 무거운 트레킹화를 풀고 수정같이 차고 투명한 물에 발을 담근다. 장강에 물이 흐리면 발을 씻고 맑으면 갓끈을 담근다 했는데.. 발만 넣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차가움을 앉고 시를 읊는다. 바람소리 물소리 함께.. 내 목소리, 이런 높고 쓸쓸하고 외로운 시를 읽어도 되는 걸까?  
오늘이 사족 1. 발 사진 찍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휴가 나온 가족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다.
2. 엄마는 토플리스다.
3. 시를 읽다 울컥했는데 급히 수습하고 자리를 피하다. 페르소나를 벗겨낸 나는 머더 메리인가 토플리스 레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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