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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7.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05

바스크의 쉴만한 물가

점심으로 복숭아 하나, 에너지바 하나를 먹고 계속 걷는다. 첫 이틀 동안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이라 짧게 했으나 이제부터 걷기 좋은 길이라 하루에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실험해 보려고 알베르게를 예약하지 않고 갈 수 있을 만큼 가보기로 작정하고 출발하다. 어제저녁에 옆에 앉았던 헝가리 씨뇨리따 안나마리아를 동네 정류장에서 만났다. 무릎이 시원치 않은 그녀는 오늘 차를 타고 이동한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에 같이 사진 한 장 남겼다.


오전에는 역시 어제저녁 테이블에 같이 있었던 발렌시아 출신 보르하와 함께 걸었다. 그의 여자 친구가 바스크 출신이라 바스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였다. 길을 가다 ‘Welcome to the Basque Country’라 쓰인 벽화와 그 밑에 스프레이로 조잡하게 Spain이라 써 놓은 걸 보고 민족의 정체성과 국가의 정체성 사이의 괴리가 이들 연애에 미치는 영향을 떠올리다 헛일이다 싶었다. 여자 친구는 그에게 팜플로냐에 5일을 머물라고 했단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그들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 정도는 해야지 했더니 까미노를 휴가 기간에 마치려면 그럴 수가 없어서 이틀을 같이 있기로 의견 조율을 했다고 한다. 현실 연애질 앞에 정체성 문제는 하찮아 보이기도 했다.

헝가리 씨뇨리따 안나마리아를 다시 만난 건 보르하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작은 마을길에서였다. 왼쪽 무릎이 아픈 그녀는 20킬로 정도를 차로 이동하고 다음 목적지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기는 천천히 갈 수밖에 없으니 나보고 앞서라 한다. 그녀를 지나치는데 괜히 짠하다.

오늘 순례길은 차도를 몇 번 가로지르고 쌩쌩 달리는 차를 마주하고 몇백 미터를 병행해서 가기도 한다. 아스팔트 위를 걸으니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발바닥이 불이 날 지경이다. 그러다 냇가를 따라서 길이 이어진다. 어디 쉴만한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가다 팔뚝만 한 송어인지 잉어인지 물고기도 보고 그러다가 다리를 건너는데 앉기에 적당한 돌들이 펼쳐진 곳을 발견하고 샛길로 접어들었다.
예쁜 딸 두 명, 개 두 마리와 함께 피크닉 나온 가족을 만났다. 한 마리가 유독 사납게 짖어 조금 떨어진 곳으로 움직여 트레킹화를 벗고 물속에 발을 담그고 오늘 지나온 초원을 생각하며 김수영의 풀을 낭독해야지 하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난다.


바스크의 시골 인심이 사납지 않으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데  바깥양반이 먹는 손짓을 해가며 나를 부른다. 구운 돼지고기와 소시지를 넣은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받아 들고 정신없이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며 잡는다. 사양할 이유가 없다. 둘째 딸 소냐가 앞이빨 빠진 채 배실배실 웃으며 자꾸 뭐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쉴만한 물가에서 늦은 점심을 하고 다시 힘을 내서 길을 나서는데 너무 잘 먹은 탓인가 시간이 4시에 가까워 작열하는 기온 탓인가 땀이 비 오듯 한다. 그러다 다시 안나를 만났다. 언덕 위 싸발디카 마을에 머물 것이라 하며 나보고 어디까지 갈 것이냐고 묻는다. 아침에 그녀가 나바라주의 주도가 있는 빰쁠로냐에 가면 의사를 만나 무릎을 보여주고 치료를 받을 것이라 한 말이 떠올랐다. 내일 짐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이 마을에 머물 거라고 했다.
마을에 유일한 알베르게는 성당과 붙어 있다. 자원봉사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늘 호스트이다. 성당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무료이다. 저녁과 아침식사 그리고 베드를 제공한다. 도네이션 박스가 있어 원하는 만큼 내고 가면 된다. 수녀님이 오셔서 여기 성당이 한국의 성심 수도원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저녁 미사에 참석하여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부분을 한국어로 읽었다.

오늘의 사족 1. 내가 이 마을에 머물기로 한 것은 순수하게 돕고자 하는 마음밖에는 없는가? 그녀의 아름다움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고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2. 도착하자마자 무릎 아대를 꺼내 주었다. 아대가 없어 압박붕대를 감고 다니는 게 안쓰럽다.
3.알베르게에서 오늘 만난 마틴은 체코 출신이다. 그는 4월 1일 그의 고향을 출발해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지금 까미노를 걷고 있다.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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