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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9.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06

과유불급 옛말이 틀리지 않다.

오늘 34킬로를 걸었다. 의도한 바는 없고 걷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바라주의 주도인 팜플로냐를 지나 황금색 밀밭을 지나는데 뒤에서 누군가 날 부른다. 로마 출신 리카르도를 다시 만났다. 어제 소몰이 축제(정확히는 인간몰이가 맞지 않나 싶다. 소가 뒤에서 쫓아오고 사람들은 소 뿔에 받히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니..)를 손짓 발짓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한다. 재미있었나 보다. 하기야 축제 다음날 아침  팜플로냐 시내를 가로질러 걸어오는데 아침부터 흰옷에 빨간 스카프를 맨 전통 축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애어른 할 것 없이 구 도심 거리마다 가득 차 있다. 축제가 일상인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리카르도는 오늘 Puenta la Reina까지 간다 하여 그냥 같이 걷게 되었다. 30킬로 넘어가니 가장 뜨겁다는 4시 근처이고 에너지도 바닥이고 왼발 바닥에서도 신호가 온다. 걷기에 가장 좋은 모티베이션은 뒤태가 좋은 레이디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키득거리며 리카르도가 이야기한다. 틀린 말은 아니나 자칫 치한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하여간에 너무 많이 걸은 탓에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시원한 맥주가 갈급하다.



설득당할 준비
어제 3번째 숙소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이다. 모노노케히메에 나오는 붉은 옻칠을 한 그릇을 쓰는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인 할머니처럼 생긴 수녀님이 글을 쓰고 있던 내게 오시더니 저녁 미사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하시길래 그렇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순례자들을 살펴보시고는 필요한 말들을 건네는데 현자의 풍모가 넘친다. 헝가리 출신 안나마리아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듯 설명하는데 설득당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오. 그녀는 이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무릎이 좋아지는 경과를 보기로 했다. 의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걷다 생긴 아픈 무릎에는 쉬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침에 길을 나서며 좋은 결정이라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이야기했으면 설득시킬 수 있었을까?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우린 모두 설득당할 준비를 하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첫 잔이 너무 맛있었던 탓에 뿌엔타라레니아 카페 골목에 있는 Bar를 돌아다니며 종류별로 맥주를 마셨다. 저녁으로 시킨 바게트 샌드위치에 곁들여 화이트 와인도 한병 비웠다. 이때까지 좋았는데 리카드로가 한 병을 더 마시자 한다. 결론은 어찌 숙소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다. 새벽에 깨니 난간도 없는 이층 침대 위칸에서 가지런히 누워서 잘 자고 있기는 하다. 순례자가 만취했으니 참 할 말이 없다.
2019.7.14.


오늘의 사족 1. 무릎 아대 마리아에게 주고 수저는 알베르게 식당에 두고 왔는데 배낭 무게가 훨씬 가벼워진 것 같다. 나흘 만에 체력이 좋아질 리가..
2.리카르도가 어제부터 스틱을 찾더니 오늘 길 가다 누가 버리고 간 좋은 스틱을 하나 발견했다며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내 스틱은 어제 숙소에 두고 왔구나.. 배낭이 괜히 가벼워질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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