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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9.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07

까미노에서 연애질

새벽에 깼는데 퍼뜩 어제 널어놓은 빨래 생각이 났다. 이슬 맞았으면 어쩌나 하고 나갔는데 빨래걸이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다시 돌아와 벙커 베드 주변을 서성이는데 리카르도도 모르겠다 한다. 잠시 몇 마디 더 나누는데 옆 베드 위칸 젊은 친구가 오더니 조용히 하란다. 옆에 들릴 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심상찮다. 어젯밤 기억이 없는 나로선 뭐라 대꾸하기도 그렇고 술은 덜 깼고 잠은 더 오고 사람들은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는데 나와 리카르도는 계속 잠을 청하기로 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주섬주섬 챙겨서 신발장에 마지막으로 남은 트레킹화 신고 나오는데 새벽에 그 청년이 다시 오더니 정색을 하고 항의한다. 너희들 어제 너무 취했다고... 어쨌든 고맙다고 하는데 눈길이 사납다. 온통 선의로 가득 찬 이들만 보다가 어찌 기이하다 싶을 정도이다.

리카르도와 작별하다.
공립 알베르게는 식사를 직접 해서 먹는 시스템이다. 베드는 5유로, 싸서 이용자가 넘치긴 하지만 아침을 꼭 많이 잘 먹어야 하는 나로서는 좋은 선택은 아닌 듯하다. 다행히 어제 한 빨래는 잘 개어서 배낭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우렁각시가 있을 리도 없고.. 거참.. 기억이 없으니.. 아침도 거르고 나오는데 기분이 영 그렇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오전에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황금색 밀밭이 추수를 마치면 작은 성채만 한 밀 짚단들이 쌓여 있다. 그렇게 풍요의 길을 가는데 마음은 휑하다. 리카르도는 중간중간 담배를 태우기 위해 쉰다. 도상에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하며 인사하고 자연스레 리카르도와 작별하다.


쉬지 않고 네 시간을 걸었더니 왼발 바닥에 다시 신호가 온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보여 갔더니 연인 한쌍이 점심을 막 마치고 인사를 한다. 그렇게 큰 오디나무는 처음 보았다. 가지마다 오디가 옹골차게 달려 있다. 어제저녁 남은 샌드위치 우적우적 먹었다. 상냥한 시뇨리따가 오디를 한 움큼 따서 물에 헹군 다음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둘이 오디던져입으로받아먹기 연애질을 시작한다. 보기 좋다.


기억의 복기
어디까지 가서 오늘 밤을 보내야 하나 하다가 애초에 계획했던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다. 마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과 와인을 공짜로 나오는 수도원 옆을 지나가는데 첫날 오후 뜨겁던 피레네 산맥을 같이 오르던 독일 청년을 만났다. 웃으며 아침에 늦게 자는 것 같더니 괜찮냐고 한다. 이제야 어젯밤을 복기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우리는 어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그리 늦지 않은 밤에 와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 항의는 필름 끊기도록 마신 내가 자다 말고 이층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웠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걸으며 어제 공립 알베르게 도착한 후부터 기억을 더듬어 보니 늦게 도착한 우리에게 남은 벙커 베드는 입구 쪽에 있었고 우리보다 조금 먼저 온 그 커플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대화가 냉랭하다. 샤워를 하고 왔는데도 여전하다. 맥주가 급했던 나는 그들 앞에서 바지를 갈아입었다. 속옷이라면 은밀한 곳으로 가서 했겠지만 바지 정도야.. 그가 화난 이유가 순례자가 만취해서 온 것 때문인지 자기 여자 친구 앞에서 바지를 갈아입은 것 때문인지 우리가 너무 즐겁게 대화를 한 것 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연애질 쉽지 않아 보였다.




오늘 도착한 알베르게는 집의 다락을 개조한 곳인데 순례자들이 남긴 글과 그림으로 가득한 벽과 조용한 마을이 내다 보이는 조그만 발코니가 있다. 마을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앞으로는 도시 그리고 공립은 피하고 작은 마을 작은 알베르게를 찾게 될 것이다.
2019.7.15.

오늘의 사족 1. 학생들 한 무리가 말을 타고 동네 한 바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말 타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2. 알베르게에 묵는 사람은 여덟이다. 나와 독일 친구, 한국에서 온 청년 둘, 모녀 한쌍, 시애틀 레이디 그리고 72살의 프렌치 할아버지 그는 5월 12일에 파리 북쪽 고향에서 순례를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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