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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20. 201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_10

걷는다는 것

어찌 된 일인지 너무 일찍 깨서 다시 잠을 이루는 일을 반복한다. 평소에도 한번 잠들면 깨지 않고 일곱 여덟 시간은 쉬이 자는 나로서는 이번 순례길의 체력소모를 감안하면 10시쯤 잠들어 새벽 2시에 깼다가 다시 잠드는 패턴이 기이하기만 하다. 급기야 오늘 출발할 때는 입술이 부르트려고 한다.

하지만 어제보다 걷기가 수월하다. 날도 뜨겁고 동행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여 꽁무니를 쫓아가기가 버겁지만 괜찮다. 하지만 페이스 유지가 무엇보다 장거리 트레킹에 중요하니 오버하지는 않는다. 다음 그늘에서 기다려 주는 게 예상되니 뭐 급해해야 할 이유도 없고 또 어쩌면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그런가 보다 하면 될 일이다.


생각이 없어짐이 어찌 보면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물리적인 조건의 열악함, 육체의 극단적인 고단함을 통해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작열이라는 표현 말고는 다른 형용사를 찾을 수 없는 태양 아래에 그늘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길을 끊임없이 걷는다.


그리고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서면 두꺼운 돌로 지어진 집에서 풍겨 나오는 그 서늘함이 우리를 맞이한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고 베드를 배정받고 스트레칭을 하고 땀을 씻어낸 다음 조몰락 거리며 빨래를 한다. 넓은 중정에 빨래를 널고 찬 맥주를 마신다.



걷는다는 거 별거 아니다.
여덟 시간 걷고 그리고 그늘에 앉아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그냥 좋다. 사는 것도 그런 거 아닐까?
2019.7.18.

오늘의 사족 1. 입술에 잡히려던 물집이 걷는 도중에 점점 작아진다. 발에 잡혀야 할게 왜 입술에..
2. 어제부터 리호아주로 들어왔는데 와인 산지답게 포도밭이 사방에 널려있다.



3. 동행한 친구 중 하나가 어제 수도원 공짜 와인에 내가 산 맥주 그리고 너무 맛있었던 스파게티 탓에 밤새 배앓이를 했다고 한다. 혼자 조용히 나가서 gran reserva급으로 한 병 먹고 와야 하나 고민 중이다. 동네 산책하다 마켓에 마침 reserva 리호아가 있길래 사 와서 함께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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