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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 Feb 03. 2023

나는 무작정 파리로 떠났다.

2023 0202


#33



나는 무작정 파리로 떠났다. 

아니, 떠나야만 했다. 모든 걸 잃었기에, 모든 걸 잊고 싶었다. 

파리로 가면, 왠지 그곳에 가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학 2학년 때 친구들과 처음 가 본 그곳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최근 무심코 본 유튜브 영상이 파리의 곳곳을 소개하는 영상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출근도 하지 않고 바로 공항으로 가 가장 빠른 파리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에펠탑이 보였다.


초가을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오후 4시쯤 된 시간이었지만 구름 낀 하늘은 도무지 해를 내어주지 않아 컴컴하니 우울한 날이었다. 


“아, 여기..”


정처 없이 걷다가 퐁네프 다리 (Pont Neuf)를 발견했다.

전에 파리에 왔었을 때 나는 분명 이 다리 위를 걸었다.

퐁네프의 다리는 사실 ‘역전’처럼 잘못된 말이라며, Pont 가 다리라는 뜻이고 Neuf 가 ‘새로운’이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Pont Neuf를 ‘퐁네프 다리’라고 한다면 ‘새로운 다리 다리’라는 무식한 표현이라며

구구절절 잘난 척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우연히 같이 여행을 하게 되었던

친한 친구 녀석의 사촌동생인 그녀를 떠올렸다. 

친구 녀석은 또 잘난 척 시작이냐며 비아냥거렸지만

그녀는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그 다리가 그런 뜻의 다리인 줄 몰랐다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시리즈 영화를 아냐고 물었다. 

그 영화의 후속작인 ‘비포 선셋’ (Before Sunset)’에 나오는 서점이 바로 여기라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을 소개해 주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는 처음 만난 셀린과 사랑에 빠져요. 하루를 같이 보낸 그들은

6개월 후 기차역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지요. 수년이 지나 결혼도 하고 

각자의 삶을 살고 있던 그들은 다시 이 서점에서 만나게 돼요. 제시가 셀린과의 이야기를 토대로

책을 썼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팬미팅을 이 서점에서 하게 되었거든요.”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 네.. 아직 못 본 영화인데 꼭 봐야겠네요.” 

내가 대답했다. 


“네, 꼭 보셔야 해요. 그리고 나랑 어땠는지 얘기해요.” 

그녀는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진심 어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살짝 격양되어 빨개진 볼 때문인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영화는 ‘비포 미드나잇’까지 시리즈 세편을 다 보았지만,

그녀는 그 이후로 만날 수 없었다. 

친구 녀석에게 연락처를 물었다면 쉽게 만날 수 있었겠지만, 

왠지 뜬금없는 것 같기도 하고, 곧장 군대를 가야 했기에 그러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제시이고, 그때 그녀가 셀린이었다면, 

여기서 딱 만나는 건데… 왠지 나이대도 비슷하고… 잘 지내고 있을까?


이런 혼자만의 상상을 하던 나는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녕 친구들, 안녕 친구들~! 모두 뛰어놀자, 뽀롱뽀롱 뽀로로~”


아들 녀석이 머리에다 대고 뽀로로 노래를 틀고 있었다. 


시계는 오전 9시. 아놔, 또 지각이다.

가보지도 않은 파리 꿈은 왜 계속 꾸는 걸까?


#내얘기아니야 #여보사랑해 #파리에같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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