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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 Mar 04. 2023

여행과 지도

2023 0302


#61


2년 전, 한국에 다시 살러(?) 가기 전 쓴 글. 벌써 2년이나 흘렀네.

그땐 적어도 5년 이상 한국에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에 도착하고 1주일 후 팬데믹이 터지고,

결국 6개월 만에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글을 다시 읽으며,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씩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도착해서 며칠간의 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생활을 글로 정리하며, 나의 감정과 관계들, 그리고 2년 전의 나와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이기도 하고..


아무튼 곧 37살 생일을 맞는 나에게 ‘새로운 지도’가 필요한 건 확실하다.


——


<여행과 지도>


나는 한국을 떠난 날에 있었던 대부분의 일을 정확히, 그리고 세밀하게 기억한다. 

2002년 8월 초,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최초 4강 진출이라는 대국민적 축제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 

나는 월드컵 때문인지 떠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무척이나 들뜬 마음을 가지고 캐나다로 떠났다.


당시 고 1이었던 나는, 1학기를 마치고 자퇴한 후 이모 가족을 따라 토론토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울산에 살던 나는 출국 하루 전, 엄마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이모네와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8월 8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밴쿠버를 경유해 토론토에 도착했다.

비행기 연착으로 새벽 3시쯤 토론토에 도착한 우리는 이모부의 지인의 도움을 받아 공항에서 그 후로 3년간 머물게 된 토론토 다운타운의 한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파트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방들. 거실, 그리고 화장실. 


커튼 하나 없이 반대편 아파트가 훤히 내다 보이는 그곳은 ‘적막’과 ‘어둠’ 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대충 씻고 가져온 침낭을 꺼내 딱딱한 마룻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가 누운 텅 빈 방은 여전히 적막했고, 여전히 어두웠지만, 

창문 너머 가로등 빛에 비추인 세상은 신비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에게 특별 임무가 주어졌다. 

집 근처 마트에 가서 ‘토론토 주변 지도’를 구입해 오라는 이모부의 지시였다. 


물론 당시에도 인터넷이라는 게 존재하긴 했지만, 구글맵처럼 발달된 지도가 존재하지 않았고,

휴대폰은 이제 막 흑백을 벗어나 컬러 휴대폰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으니 종이지도는 아주 큰 역할을 했다.


5불짜리 지폐를 손에 든 나는, 이모가 간단한 아침을 준비하시는 동안 새로운 세계로 향했다. 

다운타운이라 편의점이나 마트가 가까운 거리에 있을 터였다. 

그래도 적어도 100미터 정도는 걷게 될 거라 생각해 아파트 로비를 나오자마자 

현 위치를 확인하고 대략의 활동반경과 동선을 생각해 두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침 아파트 1층상가에 바로 꽤 큰 규모의 슈퍼마켓이 있었다.

애써 생각해 둔 짧은 여행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아쉬워서였는지 

나는 계산대 바로 옆에 지도가 있음을 확인했음에도 괜히 가게 구석구석을 살피며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여행의 기쁨을 찾으려 했다. 


“토론토 주변지도” 는 꽤나 유용하게 쓰였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도를 펴 보고는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 교회 등 여러 장소를 미리 알아 두었다. 

구글 어스가 없던 시절엔 지도를 펴 놓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이 길을 찾아가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나는 그렇게 토론토 생활에 적응해 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7년이 지났다. 


2020년 새해가 되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잠깐의 여행이 아니라 기약 없는 여행,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모르는 그런 여행을 떠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역이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17년의 캐나다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가 적응을 해야 하니 말이다. 


2002년에 한국을 떠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떠나기 전 며칠간, 떠나는 날, 그리고 도착해서의 며칠간은 아주 오랫동안 세밀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다.


한국을 떠나오며 내 시간은 2002년 고1 때 그대로 멈춰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한국에 가면 고등학생이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인지 교복 입은 한국의 고등학생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반갑고,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17년 전의 고1의 나는, 여전히 한국에 살고 있다. 

캐나다로 떠나 왔지만,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살게 되면, 

나는 17년 전의 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할 것이다.  

종이지도도 아니고 구글맵도 아닌, 

17년간의 공백을 채우고 2020년을 살게 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새로운 여행이지만, 

캐나다 교포 출신 한국인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도 또 하나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언젠가 한국생활이 끝나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살게 된다면, 

2020년 1월 17일 자로 시간이 멈춰버린 캐나다의 낯선 나를 다시 만나게 되겠지.


우리는 이렇게 어딘가로 떠나가고, 다시 돌아갈 때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고 간다. 


스톱워치를 다시 누르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누르기까지의 여정에는 특별한 지도가 필요하다.


#여행 #지도 #다시캐나다 #사랑하는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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