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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나 Jul 15. 2022

시원한 바람을 선물할게요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유난히 더위가 일찍 찾아온 올여름, 바람 한 점 없이 뜨겁게 뜨겁게 달구어진 열기를 잠시나마 식히기 위해서는 자연 바람, 선풍기 바람만으로 부족함을 느낀다. 90을 바라보는 부모님은 어린 시절 내가 나고 자란 낡은 주택에 살고 계신다. 그동안 부모님은 몇 차례의 크고 작은 집수리와 보수를 하면서 집과 함께 긴 세월을 버텨 왔다. 


아버지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응접실에는 과거에 즐겨 읽던 책들과, 한참 전에나 사용했을 법한 구닥다리 잡동사니가 쌓여 있어 아버지의 영역이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 든다. 응접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15년 된 구형 에어컨은 폭염에만 가동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적용된다. 아버지의 응접실은 복잡함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와 규칙으로 움직이고 있는 아버지만의 공간이다.       


얼마 전 아직 삼복더위가 오지 않았다며 에어컨을 켜지 않으려는 아버지와, 이른 무더위가 오지 않았냐며 에어컨을 켜려고 하는 어머니 사이에 작은 신경전이 있었다. 에어컨을 켜냐 마냐의 갈등이 뭐 그리 대수냐 하겠지만, 큰 변화 없는 일상을 살고 있는 노부부의 하루에서는 제법 큰 이슈로 작용한다. 응접실 에어컨을 틀고, 싱크대가 위치한 반대편 쪽으로 선풍기를 틀어 시원한 바람을 보내면 어머니의 밥 짓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태어나서 당신 손으로 단 한 번도 밥을 지어본 적 없는 아버지는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조리를 할 때의 급작스러운 기온 상승으로 인한 고충을 경험한 적이 없다. 가만히 응접실에 앉아 밥이 되기만을 유유 자작 기다리는 아버지와, 동동거리며 한 끼의 밥을 짓고자 더위와 사투를 벌이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면 이처럼 극렬한 동상이몽이 있을까 싶다.      


때로는 투쟁을 해서라도 사수해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 있다. 어머니에게는 밥 지을 때만이라도 에어컨을 켜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목표다. 자식들의 전폭적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낸 어머니는 “드디어 쟁취했다. 시원하고 좋네.”라는 짧은 문자로 흐뭇한 승리를 알려왔다.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했는지의 과정은 말해주지도 여쭤보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어머니의 밥 짓는 환경이 아주 조금이라도 개선된 것이고, 그것만으로 된 거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애석하게도 엄마를 위해 제 몫을 해 주어야 할 에어컨이 그만 고장이 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15년 된 구형 에어컨은 더 이상 부품을 구할 수 없어 수리가 불가능한 고물이 된 것이다. 부모님은 올여름 계획하지 않았던 큰 지출이 발생했다며 에어컨 없이 더위를 견디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어머니도 이번엔 흔쾌히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절 갈등 없이 합의가 된 모양이다.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던 부모님의 젊은 시절, 밥은 굶어도 자식 교육만큼은 힘껏 뒷바라지하자는 공동의 신념이나,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는 공동의 합의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시원한 바람을 선물할게요."    

 

어떻게 쟁취한 어머니의 투쟁인데 여기서 꺾일 수는 없다. 나는 냉큼 에어컨을 구입하러 전자매장으로 달려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바람을 선물해 드리고 싶어서 구매한 10인치 에어컨은 좁고 낡은 주택의 구조와 전기배선 문제로 아예 설치조차 되지 않았다. 나의 욕심이었다. 한 번의 시행착오 끝에 다시 구매한 6인치 벽걸이 에어컨이 안성맞춤이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딱 적절한 사랑의 크기를 배웠다.   

   

“좋은 선물을 해줘서 복더위를 시원하게 나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기분 좋은 엄마의 문자가 날아왔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림책 <파랑 오리>가 떠오른다. 젊은 시절 파랑 오리는 파란 호숫가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악어를 사랑과 정성으로 키운다. 세월이 흘러 악어는 훌쩍 자라고, 파랑 오리는 기력도 쇠하고, 기억도 자꾸만 도망간다. 악어는 파랑 오리 곁을 든든히 지키며, 오래전 파랑 오리가 자기에게 해 주었듯이 파랑 오리의 곁을 지키며 꼭 필요한 사랑을 공급한다. 파란 호수를 가득 채운 파란 물처럼 넘실대는 파랑 오리와 악어의 조건 없는 사랑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산 위에서 불어오는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처럼, 더운 여름 부모님의 이마에 흐른 땀을 잠시나마 식혀드릴 수 있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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