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나 Apr 18. 2023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공평하고 자비로운 신에게 구하는 기도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길 때, 매번 나는 옳고 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가 잘못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 나를 놓고 생각하는 경향, 자아 중심성은 태어날 때부터 장착된 본능적 무기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입장에서만 보고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타인에 대한 오해와 서운함이 생기고, 더 나아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남보다 내가 더 잘되고 싶은 욕망의 이면에는 특히 나에게 상처와 억압을 준 사람이 망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깔려 있다.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생활하다 보면 한때 친했던 사람과 이해관계로 틀어져 원수같이 되어 버리거나, 서로 눈도 마주치기 싫을 정도로 미웠던 사람과도 어느 순간 동지가 될 때가 있다. 직장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선배들의 말을 한 번쯤은 실감하게 된다. 직장 내 힘든 인간관계에 부딪히면 생각해보곤 한다. 만약 이 사람을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이 사람을 직속 상사가 아닌 동료 혹은 후배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직장을 떠나 그곳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갈등과 상처를 회고해 보면, 그때 그렇게 밤잠 못 자고 고민하며 긴장했었던 일이 작게 느껴진다. 시간이 과거의 공격적이었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더 이상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사건과 사람을 바라볼 때의 객관적 관점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때 그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평온하게 지난 경험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된다.     


가끔 최근 이직한 후배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는 과거 직장에서 겪었던 일, 현재 하는 일의 어려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준비와 도전 등 과거-현재-미래를 오간다. 그런데 유독 과거, 직장 경험을 이야기할 때면 그의 얼굴이 굳어지고 목소리가 격앙된다. 한때 그의 직장 상사였던 사람에게 언짢고 못마땅한 감정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의 옛 직장 상사는 부하직원의 공로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자기 것으로 가져간다거나, 힘든 일을 겪을 때는 아랫사람의 탓을 한다. 말로는 부하직원을 끔찍이 위하는 척하는데 실상 당사자의 피부에는 가닿지 않는다. 허울뿐인 애정과 배려. 가식과 위선, 거짓과 모함, 필요할 때만 손 내미는 계산적 행동으로 인한 폐해는 아직도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듯하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의 망령이 더 이상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과거의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고, 더 이상 그 일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내야 한다. 이때 한 번쯤은 세상의 중심축을 내가 아닌 그에게로 옮겨서 공동의 경험을 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좋다. 혹 나도 그가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이 그에게 행동했던 것은 아닐까? 혹 나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지는 않았을까? 혹 나도 그에게 말뿐인 존경을 보내며 내심 비웃고 있지는 않았을까? 혹 나는 그와의 대립 구도에서 항상 나만 옳고 선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나의 실수는 쉽게 잊어버리고, 그의 과오는 두고두고 곱씹지는 않았을까? 혹 나는 무조건 잘 돼야 하고, 그는 좀 망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신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꿰뚫어 보시므로, 내가 저지른 악행도 아시고, 그의 가혹한 행위도 모르실 리 없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수많은 실수와 잘못된 선택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었다.  차마 용기가 없어 진실하지 못했던 순간,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을 돌이켜 신의 자비와 용서를 구했던 일은 참 다행스럽다. 우리를 벌주기에 앞서 백번 천 번이고 마음을 돌이켜 잘못을 고치기를 원하시는 신은 항상 새로운 기회와 장을 열어주셨다.      


내게 이유 없이 고통을 준 사람도 신에게는 나만큼이나 소중한 생명체여서 그의 잘못을 알지만 그가 마음을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가 했던 행위가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게는 적어도 신이 허락하시는 만회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때로 왜 저런 사람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지 알 수 없어 신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그가 망하기를 바랄 때마다 기억해야 한다. 공평하신 신은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던 것처럼 그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2003년 개봉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네가 만약 일주일 동안 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물음을 던진다. 어느 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실망하며 신을 저주한 주인공 브루스에게  전지전능한 신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에게 일주일 동안 신의 역할을 위임한다. 브루스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곧 신의 능력을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거나, 모든 사람의 기도를 다 들어주다가 도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결국 브루스는 신이 왜 모든 사람의 기도를 다 들어줄 수 없는지를 깨닫는다. 기적이란 신의 능력으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짠내 나게 노력하여 조금씩 소망을 이루어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아울러 진정한 기도란 내게 불이익이 올지언정 타자의 행복을 진심으로 구하는 것이며, 신은 그러한 기도를 언제나 기쁘게 들어주신다는 것도 보여준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2003>


내게 고통을 준 사람이 망하기를 아무리 기도해도 왜 응답이 없을까? 이러한 기도는 신이 기뻐하지 않는 잘못된 기도이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신에게는 내가 망하기를 바라는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다. 설사 그도 나처럼 내가 망하기를 구하는 기도를 신에게 한다 해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반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공격이 당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것입니다.
          -팀 페리스-          
작가의 이전글 자기 앞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