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연둣빛 여린 새싹과 올망졸망 피어나는 꽃들에 환호하게 된다. 다채로운 색으로 세상을 밝히는 봄꽃을 보노라면 눈이 부시다. 아름다운 것에 경탄하며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무조건적 반응이다. 꽃은 피어나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진다. 이것이 자연의 리듬과 순리다. 꽃이 떨어지면 기다렸다는듯 잎이 난다. 자연은 순서에 따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나무는 '왜 벌써 꽃이 떨어지는지', '어떻게 하면 꽃을 더 오래 머물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자연의 생장과 소멸, 다채로운 변화를 목격할 수 있는 봄은 빛의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고치를 만들어 한동안 그곳에서 머물러 있다가, 고치를 뚫고 나와 나비가 된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지 않으면 나비도 될 수 없다. 심지어 고치 안의 번데기는 스스로의 힘으로 껍질을 뚫고 나와야만 나비가 된다. 자연은 계속 움직이고 변화한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리거나 멈춰 있는 생명체는 병이 든다. 변화는 불가피하고도 필연적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에는 묘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조치는 오히려 아름다움을 해칠 뿐이다.
'주름 하나 없는 도자기 피부', '나이야 멈춰라', '안티 에이징 anti-aging' 등 노화를 멈추게 하거나 세월을 거슬러 역행해야 한다는 식의 화장품 광고 문구가 눈에 띈다. 문득 나이 들어 생기는 주름을 꼭 없애야만 하는 것인가, 시간의 누적으로 발생하는 노화 현상에 적극적으로 맞서서 싸워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어차피 세월을 이길 장사 없다고, 노화와 싸워봐야 이길 수 없는 게임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화의 시간을 느리게 하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일 수 있다는 노하우가 있다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누구나 나이 들면 겉모습이 늙어지고, 몸의 기능이 약화된다.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변화고, 누구의 죄도 아닐진대 때로 노년은 차별과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노인학의 대가 로버트 버틀러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연령 차별(Ageism)'이라고 정의하였다. 연령차별은 원래 나이의 많고 적음을 이유로 행해지는 다양한 편견과 차별의 총칭이지만, 일반적으로 노인 차별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만큼 노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일 뿐 아니라 편견이 많다는 증거다.
일상에서 젊음은 칭송받는 반면 늙음은 폄하된다고 느낄 때가 언제일까? 노인의 출입을 반가워하지 않는 도시의 카페, 노인의 대중교통 무임승차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식당이나 호텔에서 노인종사자의 서비스를 받는 것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 계단을 느릿느릿 보행하는 노인 앞지르기 등 흔히 발생하는 노인차별이나 혐오의 흔적이다. 이보다 귀여운 연령 차별의 증거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학교 동창에게 "너 옛날 모습 그대로다"라고 말하거나, 어르신에게 덕담처럼 "오늘따라 더 젊어 보이세요. 여전히 고우세요. 활기차시네요. 청년 같으세요."라는 말을 건네면 무조건 기분 좋게 반응한다. 반면 아가씨에게 아줌마라고 하면 발끈 화를 내고, 아줌마에게 할머니라고 하면 속상해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언제부터인가 나이 든 사람을 '짐'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 세대가 부양해야 할 노인 인구가 증가한다고 여기는 부정적 인식이 만연하다. 이를 반영하고 있는 일본 영화 <플랜 75>(2022)는 국가가 고령 인구를 줄이기 위해 법적, 조직적으로 노인을 차별하고, 교묘하게 노인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에서 보는 내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영화의 배경에 깔려 있는 노인혐오 문제는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하고 고령 인구가 증가하는 우리 사회 현실과 맞물려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 '플랜 75'란 누구나 75세가 되면 국가에서 죽음을 도와주는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제도다. 즉 75세에 죽음을 선택하는 노인을 위한 정부의 복합 서비스를 신청 즉시 10만 엔의 현금 지급이 되고, 안락사와 화장까지 무료로 제공된다. 얼핏 보면 노년에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도와주는 듯 포장되어 있지만, ‘플랜 75’의 궁극적 목적은 노인 복지에 소요되는 경비절감, 경제적 이익에 있기 때문에 상당히 비인간적이다. 담당 공무원은 죽음을 신청한 노인에게 꽤나 따뜻하고 친절한 응대를 한다. 그들의 역할은 한 번 죽을 결심을 한 노인이 뜻을 번복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죽기로 예정된 노인이 나와 전혀 무관한 타자가 아니라 의미 있는 가족 중 한 명일 때도 연민이나 공감을 배제한 채 끝까지 죽음을 권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당신도 늙어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죽어요."
아드리안 반 위흐레흐트, <Vanitas-Still Life with Bouquet and skull, 1643>
'바니타스화'는 짧은 생의 덧없음과 유한함, 죽음을 주제로 하는 그림이다. '바니타스'는 구약성경 [전도서 1장]에 기록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의 글귀 첫 단어를 따 온 것이다. 바니타스화에 등장하는 시계는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만개한 꽃이나 시들어가는 꽃은 곧 지나가버릴 젊음을, 해골은 필연적인 죽음을, 담뱃대는 곧 사라지고 말 권력과 인기의 무상함을, 보석이나 비단은 세상에서 누리는 사치가 허무한 것임을 암시한다.
나에게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으므로 현재의 삶이 더욱 소중해진다. 젊음의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가므로 영원히 자랑할 게 못 된다. 어린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때만 삶이 빛난다. 단지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심각한 폭력이고 비극이며 공포스러운 현상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 나이 들수록 인간의 존엄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 쉽게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노화와 노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생에서 노년은 재앙이 아니라 선물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살아온 삶의 경험만큼 깨달을 수 있는 지혜와 혜안을 젊은 세대와 나누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노년을 꿈꾼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다가올 노년의 밑그림이 그려질 거라 생각하면 내 앞에 주어진 '지금'이라는 시간이 한없이 소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