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18)
“유 대리님!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수화기 너머로 인상 좋은 미소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채용업무를 하던 시절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헤드헌터로, 조건에 맞춰 무조건 이력서를 뭉터기로 넘기던 다른 헤드헌터와 달리 사전 면접까지 꼼꼼하게 진행하던 사람이다. 좋은 사람을 추천하기 위해 제대로 노력하는 몇 안 되는 ‘진짜’ 헤드헌터. 자기 업에 대한 자부심이 참 강한 사람이었다.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회사 그만두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이렇게 먼저 연락을 주셨네요. 죄송합니다.”
아니, 사실은 회사를 그만두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문자가 왔었다. 그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던 것은 나다. 이사님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체면치레 인사가 끝난 자리에 질문이 따라온다. 어디 이직을 하신 건지요,라고. 1년 가까이 노무사 시험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말과 함께, 사정이 생겨 다시 회사를 나가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인다.
“운이 좋았네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인사팀 채용 추천 의뢰가 하나 들어왔는데. 경력 조건이 유 대리님과 잘 맞아요. 업종은 다르지만 관리부서라 크게 영향은 없을 거예요. 회사 정보는 문자로 넣어드릴게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함께 보내주세요. 급하게 진행하는 건이라 오늘 중으로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지원자들 면접이 내일모레거든요.”
제가 적극 추천해드릴게요, 라는 이사님의 말에 감사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는다. 곧이어 오는 문자에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회사의 이름이 찍혀있다. 전 회사처럼 대기업은 아니지만 제법 인지도가 있는 중소기업이다. 컴퓨터를 켜고 오래전에 썼던 자기소개서를 찾아 파일을 연다.
“이걸로 대체 어떻게 입사를 한 거지.”
자기소개서를 읽다 나도 모르게 한탄이 새어 나온다. 이 자기소개서로 대체 어떻게 취업에 성공한 걸까. 수년간 채용 업무를 진행하면서, 그 숱한 자기소개서를 평가하면서 정작 내가 썼던 자기소개서를 떠올려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자기소개서를 지금의 내가 평가했다면 100% 불합격이다. 면접은커녕 인적성 시험 기회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영락없이 새로 써야 한다.
자기소개와 성격의 장단점, 입사 후 포부까지 술술 써 내려간다. 수천 명의 자기소개서를 보던 것이 이렇게 내공이 되는구나 싶다.
나도 모르게 쓴 단어 하나가
두 손에 가시처럼 박힌다.
그리고 마지막 직무기술서에 다다랐을 때, 나도 모르게 쓴 단어 하나가 두 손에 가시처럼 박혀온다. 인력 효율화.
담배를 입에 물고 밖으로 나선다. 빌라 주차장 구석 재떨이에 살얼음이 꼈다. 어느새 성큼 겨울이 다가왔다. 불을 붙이자 폐 속 가득 연기가 차오른다. 들이쉬는 것은 검은 연기인데, 내쉴 때 나오는 숨은 하얗다.
“형님, 아시죠. 어차피 못 이겨요.”
그래, 정호야. 어차피 못 이기지. 자, 고기 다 탄다. 우리 오늘은 실컷 먹고, 죽도록 마시자. 귓가를 떠도는 목소리가 고양이 울음소리에 지워진다. 뒷산 고양이가 내려와 다리에 머리를 문지른다.
“나비야 미안해. 오늘은 간식이 없어. 다음에 오늘 몫까지 캔 두 개 따줄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다리에 달라붙는 고양이를 뒤로하고 다시 방으로 향한다. 오늘 중으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두 시간가량 문장을 고치고, 표현을 바꾸고, 내용을 바꿔가며 자기소개서를 완성한다. 임원들의 눈길을 끌 소재의 적절한 배치와 어휘 선택에 공을 들인다. 완성된 내용을 다시 보면서 이게 정말 내 경력이 맞나 싶지만, 같은 말이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이 정도면 포장이 조금 있을지언정, 면접에서 거짓말이라고 하지는 않겠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첫 번째 문항을 본다. 일꾼 유정호가 보인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나와 똑같이 생겼는데, 어딘가 낯선 구석이 있다.
“면접 잘 보셨나요?”
면접장을 나와 헤드헌터에게 전화를 건다. 지하주차장에 목소리가 울린다.
“네,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질문이 많이 집중되었습니다, 라는 말에 헤드헌터의 사람 좋은 웃음소리가 내 목소리보다 더 크게 울린다.
“느낌이 좋았어요. 이 회사가 유 대리님이 다니셨던 전 회사에 대해 인식이 좋아요. 거기 사람들이 악바리 기질이 있다고. 자기소개서 경력사항도 잘 쓰셔서 추천하는데 어렵지 않았어요. 결과 통보받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빨래를 널고 있다.
“왔어요? 웬 정장이에요?”
“당신이야말로, 이 시간에 집에 다 있고. 웬일이에요?”
가방을 내려놓고 바구니에 손을 넣는다. 축축하게 젖은 양말이 한 뭉텅이가 손에 잡힌다.
“오늘 병원에 약 타러 가야 해서 반차 썼어요. 웬 정장이에요? 어디 다녀왔어요?”
응, 전에 회사에서 일할 때 알고 지내던 사람을 만나느라, 하고 얼버무린다. 허리를 편 아내의 두 눈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오랜만에 보는 정장이네. 우리 남편 멋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주차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 간식 캔을 따서 내려놓는다. 나비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두고 다음 날이면 꼭 빈 캔이 구석까지 밀려있다.
새벽의 어느 한 조각에, 나비는 이제 제법 날쌔게 달릴 줄 알게 된 아이들을 데리고 와 허기진 배를 채울 것이다. 나비 가족이 오붓하게 참치캔을 둘러싸고 앉아 챱챱 소리를 내며 식사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광경이다. 지잉, 핸드폰이 울린다.
[축하드립니다. 합격하셨어요. 지정 병원에서 건강검진받으시고 이상 없으시면 연봉 협상하시게 될 것 같네요]
헤드헌터의 기쁨 가득한 문자를 보자, 숨 막힐 듯 긴장감 가득하던 면접실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유정호 씨가 다니던 전 회사가 사실 국내에서 알아주는 좋은 회사인데, 그만 두신 이유가 뭔가요?”
안경을 쓸어 올리며 면접관이 묻는다. 두 눈에는 의구심이 섞여있다. ‘좋은’ 회사라. 좋은 회사의 기준이 무엇일까.
좋은 회사의 기준이 무엇일까
“전 회사는 분명 좋은 곳이었습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일하는 동안 인사 업무의 기본과 철학을 쌓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국내 일류 기업의 일하는 방식과 업무 시스템, 프로세스를 익힌 것도 정말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큰 만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동시에 느꼈습니다. 분명 좋은 회사였지만, 좀 더 발 빠르게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업무 환경과 큰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회사라도 제가 책임감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부족한 전문성을 더 기르고자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근로기준법과 민법 등을 공부했습니다.”
“그럼, 회사를 다니면서 노무사 시험도 보실 생각이십니까?”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 일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처음의 목표가 노무사가 아닌 인사 업무의 전문성이었기 때문에, 노무사 자격증에 집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옆 자리에 있던 다른 면접관이 말문을 연다. 전 회사의 팀장과 비슷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만약, 상사가 업무지시를 내렸는데, 이게 불법은 아니지만 도의적으로 비난의 여지가 있는 일이라면, 하지만 회사에 큰 이익이 된다고 한다면, 유정호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이상 회사가 내 삶을, 내 고용안정성을 책임져 주지 않아]
영은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한다.
“일단 도의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혹시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자세히 조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시한 상사에게 보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면접관의 눈에서 빛이 난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빛이다. 아, 그래. 늘 회사 복도에서 마주치던 사람들의 눈동자다. 아주아주 익숙한 그 눈동자들.
“...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그 이후의 결정은 회사에 맡기고 따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집에 들어서자 아내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뒤로 다가가 두 손으로 허리를 감싸고, 아내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깊은숨을 들이쉰다. 희미하게 병원 냄새가 난다.
“여보.”
“응?”
달그락 거리는 접시를 조심스럽게 쥐며 아내가 대답한다.
“사랑해요.”
피식, 웃으며 아내가 말한다.
“나도. 나도 사랑해요.”
밤이 깊어간다. 내일은 나도 병원에 가야 한다. 검진을 받고, 일주일이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문제가 없다면 2주 후에는 새로운 회사에 나가게 된다.
숨을 깊이 들이쉬며 되뇐다.
나는 나쁘지 않다.
슬픈지 기쁜지, 불안한 건지 안심이 되는 건지 모를, 덩어리 진 감정이 파도처럼 덮친다. 아내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나쁘지 않다. 다시 한번 숨을 깊이 들이쉬며 되뇐다. 나는 나쁘지 않다. 그래, 나쁘지 않다.
창 밖에서 나비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스팔트 바닥에 통조림 캔이 긁히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참치캔을 둘러싸고 나비 가족이 식사를 한다.
배가 부른 나비는 이제 제법 커버린 새끼 고양이들과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겨울이 끝나고 나면, 나비는 아이들을 쫓아낼 것이다. 발톱을 잔뜩 세우고, 등허리의 털을 곧추세우고는, 하악 하는 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