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오늘의 커피는 시다
고요한 어둠이 깔린 새벽.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뜬다. 첫째가 엄마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싫어. 엄마랑 같이 잘 거야.”
아냐. 싫어. 같이 가. 안아줘. 아이의 목소리와 울음소리는 커져가고 결국 방에서 자고 있던 둘째가 울음을 터뜨린다. 세 돌에 가까워지고 있는 첫째. 첫 돌에 가까워지고 있는 둘째. 두 아이의 밤은 번갈아 터지는 울음, 그리고 생떼와의 전쟁이다.
아빠가 대신 안아줄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에 깨서 엄마를 찾는 첫째다. 아이 침대에 구겨져 누워 잠을 재우고 침대에 돌아온 아내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울며 들어오는 첫째의 손에 끌려 나간다. 오늘은 꼭 새벽에 깨더라도 엄마 아빠를 찾지 않고 아침까지 자기로 약속하고 또 약속했더랬다. 용감한 목소리로 비장하게 말하던 아이는 컴컴한 침대 곁으로 달려와 당당하게 소리친다. 빨리 일어나라고. 나랑 같이 내 침대로 가자고.
“오늘은 엄마가 너무 힘들어. 아까 약속했던 것 기억나지? 얼른 방으로 가서 자. 아니면 아빠가 엄마 대신 안아줄까?”
그런 약속 한 적 없노라고 답하는 아이. 아빠 말고 엄마. 엄마 안아줘. 안아줘. 안아줘. 안아줘. 안아줘.
엄마를 흔드는 손이 과격해진다. 벌써 몇 주째 엄마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빠는 아니란다. 낮에는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파란색, 초록색인 아빠인데, 열 개만큼 사랑하는 아빠인데, 새벽에 아빠는 주황색이 된다. 아빠 주황색이야. 아빠 싫어. 엄마만 좋아. 아빠 저리 가. 발에 차인 아빠는 당황스럽다. 대체 왜. 우리 좋았잖아. 세 시간 전만 해도 볼 비비고 사랑해 하고 눈웃음 지었으면서. 대체 왜.
한 번은 낮에, 아이가 기분 좋을 때 조심스레 물었다. 낮에는 아빠 파란색이지? 근데 왜 새벽에는 주황색이야? 아빠 좋지 않아?
아이가 답한다. 새벽에 아빠가 옆에 있으면, 엄마가 내 옆에 오지 않는다고. 혹여라도 아빠가 자신을 달래는 데 성공하면, 엄마는 둘째에게 집중하고 자신에게는 오지 않는 것이 첫째는 싫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엄마를 빼앗긴 첫째의 상처가 엿보인다.
엄마도 사람이라서
하지만 엄마도 사람이라서. 몇 주 째 제대로 잠을 못 잔, 너무너무 잠이 고픈 사람이라서, 오늘은 도저히 아이에게 갈 기력이 없다. 이대로 아내를 침대 밖으로 보냈다간 다음 아내의 침대는 안방이 아닌 병원에 마련하게 될 것만 같은 이 기분을 아이가 알리가 없다. 어르고 달래도 아이는 목소리를 높여가고, 결국 둘째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돌잡이도 하지 않은 갓난아기의 울음은 엄마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 부적이 붙은 강시가 깨어나듯 아내가 몸을 일으켜 부스럭부스럭 안경을 쓴다. 아이 방으로 향하는 아내, 그리고 더 크게 우는 첫째. 참지 못하고 아내도, 나도 첫째에게 크게 화를 내고 말았던 오늘, 새벽이었다.
오늘의 커피는 시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한 지 정확히 3주 차가 시작되는 날이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한가득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에게 줄 커피를 꺼낸다. 상큼한 시트러스의 향과 달콤한 재스민 향이 이 찌든 육아의 피로를 달래주지는 않을까. 온두라스 중약배전 워시드 커피 20g을 갈아 하리오 V60에 얹는다. 처음 하리오 V60으로 내렸을 때의 재스민 향과 감의 달콤한 향이 가득했다. 커피가 식을수록 시트러스의 산뜻한 산미가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으로 올라왔던 정말 맛있는 커피다. 마지막까지 단맛이 풍성한, 기분을 상큼하게 바꿔줄 그런 커피.
뜸 들이기 40ml, 1차 푸어 80ml. 10초 쉬고 100ml, 다시 10초 쉬고 80ml. 어제와 똑같은 레시피인데, 마지막 푸어에 삐끗, 물이 왈칵 쏟아지듯 커피 베드 위를 세차게 때린다. 층층이 쌓여있던 커피가 와류로 엉망진창 뒤섞인다.
“네 맘대로 할 거야? 약속했어 안 했어. 약속 안 지켜도 돼? 엄마 엄마 침대에서 못 자면 아파서 병원 가야 된다고 했지! 엄마 아파도 돼? 엄마 병원 가라고 할까? 엄마 병원 가고 없어도 돼?!”
아이를 다그치던 나의 목소리가 물줄기에 섞였나. 간밤의 소란은 아침 해가 쓸어간 듯, 아이들이 나간 집은 고요하기만 하다.
물이 다 빠지길 기다려 드리퍼를 내리고 아내의 잔에 커피를 따른다. 조르륵.
“… 어제랑 다르게, 오늘은 많이 시네.”
아내가 말한다. 그 말대로다. 레몬 제스트 같은 신 맛이 찌르듯 단 맛을 뚫고 나온다. 재스민 같은 봄꽃 향은 그대로인데, 귤락인지 오렌지 껍질인지 시트러스의 뭉특한 씁쓸함도 함께다.
오늘의 커피는 시다. 여전히 단맛은 많은데, 뚫고 나온 신 맛이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왈칵 쏟아낸 바로 그 물줄기 하나가, 이토록 시리게 뒷맛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