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당신을 위해 준비한 가장 특별한 향
아픈 아내와의 병원 외출을 마치자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점심을 마친 아내가 침대에 눕고, 덩그러니 주방에 남은 나는 숙제처럼 부스럭 원두를 담은 통과 콜드브루 메이커를 꺼낸다.
감사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였다. 재수 옴 붙은 것 같은 내 곁을,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주었다. 그들에게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선물이 뭘까. 다른 사람에게 두루 쓸모가 될 나의 재주가 뭘까. 떠오르는 것이 커피뿐이다.
참 애매하다. 사람들을 죄다 초대해 커피를 내려줄 수도 없고, 커피 용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그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커피를 내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가진 커피 내리는 재주도 써먹지 못하는 것인가 싶던 찰나, 찬장에서 잠자고 있는 콜드브루 메이커가 떠오른다. 이거라면 꽤 괜찮은 선물을 만들 수 있다.
커피는 꽤나 섬세한 친구다. 원두를 얼마나 가늘게 분쇄하는지에 따라, 물 온도에 따라, 물과의 접촉 시간에 따라, 물과 커피의 비율에 따라, 어떤 추출 도구를 쓰느냐에 따라, 커피를 담는 서버의 온도와 커피잔의 형태에 따라 그 향과 맛이 시시각각 변하고 만다. 그런 휘발성과 일회성이 강한 커피를 선물로 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콜드브루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에스프레소나 핸드드립으로 마시는 커피와는 다르게 차가운 물로 장시간에 걸쳐 추출한 콜드브루는 향이 강하게 농축된 원액의 형태가 된다. 이 원액은 잘만 다루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주 정도 까지도 보관이 가능하다. 충분히 선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중에 살 수 있는 많은 콜드브루가 있다. 같은 원두라면 내가 내린 것보다 전문가가 만든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그 콜드브루가 더 맛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만든 선물이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맛있는 콜드브루를 잘 찾아서 사서 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콜드브루를 만드는 나의 시간과 노력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전문가는 결코 팔지 않을 콜드브루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찾아도 살 수 없는 콜드브루.
향기로운 과일주 같은 콜드브루를 만들었다
일정 등급 이상의 커피 원두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뉜다. 꽃과 과일향이 메인이 되는 부류와 초콜릿, 견과류의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메인이 되는 부류. 전자의 경우 휘발성이 강해 금방 사라지는데 반해 후자는 묵직하게 오래 지속된다.
콜드브루는 보관하면서 마시는 커피이기에, 대부분 초콜릿과 견과류의 향미를 살릴 수 있는 원두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품이라면 늘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기에 꽃과 과일향을 메인으로 한다면 품질을 보장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나 같은 개인이 선물용으로 만들 때는 셈법이 달라진다. 선물할 사람과 만날 약속을 잡고, 만나기 하루나 이틀 전에 딱 줄 만큼 만들면 된다. 그리고 딱 마실 날짜를 정해주는 것이다. 꼭 이 날 마셔라. 조금 늦게 마시더라도 절대 이 날짜는 넘기지 마라. 상업용으로는 결코 못할 일을, 선물이기에 할 수 있다.
그렇게 한 달 전부터 콜드브루를 만들기 시작했다. 며칠의 텀을 두고 사람들을 만날 약속을 잡았다. 날짜에 맞춰 순차적으로 커피를 만든다. 먼저 만난 몇 사람이 마루타가 되었다. 피드백을 받아 보완하고 또 보완해서 한 달이 지난 지금, 드디어 표준 레시피를 완성했다. 아직, 만나야 할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설 전에 다 만날 수 있을까? 새해 인사를 하기 전에, 모두 마무리하고 싶은데. 마음만큼 시간도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더 맛있을 커피
오늘은 3일 뒤에 만날 친구들에게 줄 콜드브루를 만들었다. 원두를 갈아 통에 넣고 침칠봉으로 잘 저어준다. 탬퍼로 살살 표면을 문질러 평평하게 만들고 그 위로 필터를 깐다. 2초에 한 방울. 5시간에 걸쳐 400ml의 커피를 내린다. 15분에 한 번씩 물방울의 속도와 물 온도를 확인한다.
커피를 내리면서 이 커피를 받을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이 사람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었는지, 무엇이 감사했고, 또 무엇이 이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었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진한 커피가 병에 쌓여간다. 한 방울 한 방울 정성스레 쌓인 것이, 그동안 쌓은 그 사람과의 추억이고 마음 같다. 그저 그곳에 그렇게 있어줌에 감사해진다.
추출이 완료되면 통에 모인 커피를 병에 옮겨 담는다. 화사한 과일향이 진하게 뭉쳐있다. 적당량의 물과 얼음을 섞어주면 럼과 같은 맛이 난다. 며칠 더 지나면 과일향은 둥글어지고, 적당한 초콜릿 향도 함께 살아난다. 일주일 정도는 럼의 향미가 계속 살아있는, 특별한 콜드브루가 완성되었다. 찰랑이는 유리병 입구에 봉인 씰을 압축해 붙이고 측면에 라벨을 붙인 후 박스를 접어 곱게 포장한다.
콜드브루는 원래 추출 후 2, 3일 정도는 숙성이 필요하다. 오늘 마시면 그 향이 복잡하고 난잡하다. 커피가 가진 노트들이 제각각 팝콘처럼 튀어올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하루, 이틀, 사흘 차가운 냉장고 안에서 숙성을 하다 보면, 향은 서로 부드럽게 깎여 무지개처럼 그 경계를 나누고 조화를 찾는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더 맛있을 커피다.
오늘의 커피는 내일이 더 맛있을 커피다. 당신과 함께할 내일의 향이 더 깊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