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너에게 위로 대신 건네고 싶은 한 잔
고요하던 방 안에 요란한 기계음이 울린다. 평화로운 낮잠을 자던 까마귀가 총소리에 놀라 깨어나 울부짖듯, 프린터가 굉음을 내며 종이를 토해낸다. 버크만 테스트. 얼마 전 만난 변호사 친구의 진단지다.
버크만 테스트는 일종의 심리진단 도구다. 굳이 비유하자면 MBTI와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MBTI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재미로 보는 테스트인 반면 버크만 테스트는 심리학 연구자에 의해 고안되고 검증되어 70년 넘게 연구되고 발전되어 온 진단툴이라는 것이다. 누적 케이스가 천만 단위를 넘어서고 산업 분야에서는 팀빌딩, 리더십교육, 인적성검사 용도로 활용하고, 개인 단위에서는 부부심리상담이나 진로상담 같은 것에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MBTI는 얼마든지 공짜로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반면 버크만 테스트는 유료다. 그리고 정식 교육을 받은 디브리퍼에게서만 테스트를 보고 결과를 받을 수 있다.
그는 지쳐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많이 지쳐있었다. 여러모로 쉽지 않아 보였다. 아니, 무엇 하나 편안하지 않아 보였다. 식사하는 내내 그가 보인 얼굴은 국내 5대 로펌에서 한창 상한가를 찍고 있는,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가 지을 만한 표정 같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는 편이었다. 굳이 고민거리를 만드는 걸 즐기지 않았고 단순하게 보고 쉽게 풀어가길 좋아했다. 그는 편안하려면 얼마든지 편안하고, 쉬우려면 얼마든지 쉬워질 수 있는 성격의 친구다. 30년 가까이 곁에서 바라본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버크만 테스트 한 번 해볼래?
“버크만 테스트 한 번 해볼래? 내가 봐줄게. 비용은 됐어. 새해 선물로 내가 해줄게.”
멀뚱멀뚱 바라보던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테스트를 발송했다. 시간 될 때 해. 대신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일주일이 지나고 그가 테스트를 완료했음을 확인했다.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그는 테스트를 봤다. 어쩌면 이마저도 지쳐서 안 하고 싶어 하려나 했는데, 다행히 그는 조용히 혼자 있을 시간과 공간을 마련했다. 왠지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빛나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마우스를 클릭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25년 전 둘이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어느 독일의 작고 낡은 기차역 벤치에 앉아 가족에게 엽서를 쓰던 그의 옆모습이 그 위에 겹쳐졌다. 그 둘은 무척 닮았고, 서글프게 달랐다. 우리는 어느새 이렇게 낡아버렸다.
결과지를 뽑아 후루룩 단숨에 훑어보았다. 첫눈에 그가 가진 딜레마가 잡힐 듯하다. 내가 아는 그 친구와, 차마 몰랐던 그의 숨겨진 것들이 모자이크 퍼즐처럼 자리 잡아간다. 그래서 그랬구나. 너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긴다.
그의 삶이 어떻게 그를 풍화시켰을지 알 것 같았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하루하루에 우리는 이렇게 바래고 말라갔다. 솔직히 다 던지고 일 년쯤 쉬고 싶다는 그의 말은 조용했다. 그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점심 시간대의 식당에서도 어떤 목소리보다 더 또렷하게 들렸다.
결과지를 덮고 커피를 내린다. 콜롬비아 나리뇨 엘 타블론 워터 EA 디카페인. 20g의 원두를 저울에 올려 결점두를 솎아낸다. 못난 것이 거의 없는 최상급 원두다. 살짝 물을 뿌리고 평소보다 조금 굵게 갈아 하리오 V60에 올린다.
오늘은 아이스다. 영하 10도의 추위가 집 안에 웃풍을 만들어내지만, 과열된 몸과 마음을 식혀주고 싶었다. 얼음 250g을 담은 서버에 천천히 짙은 갈색의 커피가 흘러내린다. 원두와 커피의 비율은 1:10. 추출시간 2분 40초. 평소보다 좀 더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렸다.
잔에 따른 커피에서 베리 계열의 과일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신맛이 높고 단맛도 좋다. 발효취가 있는데 시트러스까지 가지는 않고 베리 느낌에서 머무른다. 리치, 크랜베리, 바디감 중간. 클린컵.
식도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은은한 단 향의 여운이 깊다. 혀를 누르는 체리 같은 단맛과 산미가 맴돈다. 복합적인 과일의 향이 여럿 섞여 있으나 난잡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러데이션을 그린다. 조화롭다. 너무 밝지 않고, 차분하면서, 활기가 있다.
우리 삶도 이렇게 조화로울 수는 없을까.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 같은 우리의 삶이, 조금은 그러데이션을 그리면서 가면 안 되는 걸까. 힘을 빼야 다른 곳에 힘을 줄 수 있음을, 우리는 난잡하지 않게 라운드 한 맛으로 감싸 안을 수는 없는 것일까.
오늘의 커피는 디카페인
40대 가장의 삶은 리치, 크랜베리, 발효취가 머무는 밝지 않은 시트러스. 오늘의 커피는 디카페인. 늘 풀충전일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마시지만, 네게 주고 싶은 한 잔의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