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올해는 작년과 반대로 한다.
“다녀올게요. 있다가 봐요.”
일요일 점심. 아내가 현관문을 나서며 말한다. 한 손에는 둘째가 들려있고, 다른 손은 첫째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첫째가 엘리베이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한다. 다녀오겠습니다아아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이 닫힌다.
아내가 친정에 갔다.
기묘한 이야기의 공간을 분리하던 막처럼 현관문은 순식간에 집을 다른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아침부터 칭얼대던 첫째와 속도가 붙은 네 발로 고집스럽게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하던 둘째가 남긴 메아리가 쏟아지는 햇살 속에 안개처럼 증발한다.
시계는 열 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주섬 주섬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고 계란 하나를 밥에 풀어 간장과 참기름에 섞는다. 엊저녁 볶음밥을 하고 남은 햄이 보여 간단하게 프라이팬에 구워 식탁에 올린다. 이렇게 보니 진수성찬인데, 준비까지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먹고 치우는 것은 더 빠르다. 평소라면 두 시간이 걸릴 한 끼 식사가 십 오분 만에 뚝딱 끝나버렸다.
한껏 부른 배를 문지르며 소파에 앉는다. 아이 둘이 폭탄처럼 어질러 놓은 장난감이 어지럽게 발에 차인다. 드문 드문 빈 바닥 사이로 소리 없는 뱀처럼 나른함이 시간을 삼키며 다가온다.
그렇게 나른하게 한 달이 지나갔음을 문득 깨달았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오늘이 2월의 시작이라는 것을. 작년 한 해가 그러했듯이, 올 한 해도 폭풍처럼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어느새 2026년이, 새해가, 더 이상 새해가 아닌 순간으로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다. 아이가 크는 속도도, 부모님의 주름도, 나의 노화도, 통장의 잔고가 말라가는 것 까지도.
모처럼 생긴 한적한 시간에 미루고 미뤄 두었던 지난 한 해를 복기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미 늦었다. 어차피 돌아본다고 바뀔 것도 없다. 평가할 뭐가 있어야 복기도 하는 건데, 그저 반성할 뿐일 시간에 노력을 쏟는 것도 낭비일 뿐이다. 그냥 작년처럼만 하지 않으면 된다. 작년과 반대로 하면 된다.
일단 졸음을 쫓고, 뭐라도 쓰자고 생각한다. 커피를 내릴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에, 이럴 때를 위해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드립백을 꺼낸다.
블랙업 커피의 에티오피아 싱글 오리진. 물을 올려 93도에 맞추고 유리잔 가득 얼음을 채운다. 얼음 150g, 차가운 물 50ml. 블룸 20ml. 3차에 걸쳐 총 100ml를 추출한다.
추출시간 2분 30초. 졸음을 쫓을 차디찬 아이스커피. 달콤한 청사과와 시럽의 단맛이 느껴지는 맛있는 커피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클린컵. 찬 물은 넣지 말걸 그랬다. 맹숭맹숭, 좋은 커피를 망친 것 같아 속이 쓰리다.
커피잔을 들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아내가 오기까지 내게 몇 시간이나 있을까? 걸어서 고작 10분 남짓 한 아내의 친정 방문은 아마도 그다지 길지 않을 듯싶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교집합을 만들어본다. 그 수가 적지 않아 당황스럽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지는 말자.
올해는 작년과 반대로 한다.
올해는 작년과 반대로 하면 된다. 주저하지 말고, 지레 겁먹지 말고. 일단, 키보드를 한 번 더 누르자. 그리고 한 자 더.
그렇게 오늘을 쌓는다. 아이들이 올 때까지. 현관문 너머로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