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0년 차 부부의 싸우지 않는 법

09. 둥글게, 서로를 깎아간다.

by Kyle Lee

“대체 왜 또 그래. 그냥 말해주면 안 돼?”


아내가 목소리를 높인다. 또. 그 ‘또’라는 한 음절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낸다.


“있다가, 애들 어린이집 가고 나서 얘기해요.”


당황스럽기도, 화가 나기도 하는 마음을 누르고 최대한 침착하게 아내에게 말한다.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는 다른 사람이다



결혼하고 만 11년이 다 되어간다. 11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던데,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를 느끼고 만다.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고 오늘이 되기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두 번의 대통령 탄핵과 한 번의 계엄 발표가 있었고, 이태원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압사당하는 참사가 있었다. 세계적으로는 코로나를 포함한 두 번의 팬데믹이 지나갔고, 중동과 동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일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최근 1년은 더 심각하다. 전 세계 안보 동맹과 경제지형은 뿌리부터 흔들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결혼하고 고작 11년 만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리고 그 사이, 우리에겐 딸과 아들이 생겼다.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는 너무도 다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듯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약한 부분을 잘못 건드리고 만다. 별생각 없이 툭 던진 뭔가가 상대의 약한 부위를 건드리는 것이다. 툭. 벽에 던진 고무공이 우연히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튕겨 나온 공이 전구를 깨트리는 것처럼.


오늘 아침도 그랬다. 정말 별것 아닌 한 마디의 말에, 아무것도 아닌 한 음절에 우리는 감정을 다치고 만다.


당신은 계속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고 둘만 남은 집에서, 우리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의도했던 것, 내가 말하지 않고 혼자 가지고 있던 생각, 내가 화가 났던 것, 그리고 서운했던 것에 대해 더듬어간다. 말은 미묘하게 그 본래 뜻에서 미끄러지기에, 더듬더듬 그 본래의 형태를 신중하게 그리는 것에 집중한다. 온전하진 않지만, 비슷하게나마 그 느낌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 과정이 구차하고 비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지나고 나야 오롯한 내 감정의 알몸이 드러난다. 간혹 그 본체가 부끄럽고 유치해도, 그마저도 나임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이게, 당신이 결혼한 나란 사람이란 걸 알려줘야 한다. Vice Versa. 아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사랑을 시험한다. 이런 나를, 당신은 계속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대화는 중간중간 피어나는 침묵의 그림자를 이겨내며 결국 그 끝에 다다른다. 그러고 나면 한동안 어색하고 민망하지만, 또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서로를 보듬을 수 있게 된다. 다행히 이번에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긁어내는 일 없이 솔직할 수 있었다. 이상적이지 못한 못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그런 것으로 그냥 받아들여줌으로써 우리는 다시 편안해진다.


오늘의 커피는 특별한 한 잔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점심을 마치고 나른해진 우리는 잠시 침묵의 호수 위를 떠돌다,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전에, 다시 바빠지기 전에, 우리는 정신을 맑게 해 줄 카페인이 필요하다.


tempImageG4hmPH.heic
tempImageCx2dbV.heic


오늘의 커피는 파나마 하시엔다 라 에스메랄다 베르데스 게이샤 4ANB. 세계 최고의 커피로 꼽히는 파나마 게이샤, 그것도 유서 깊은 에스메랄다 농장의 작품이다.


tempImageef1ahI.heic
tempImage5v7Uhf.heic
tempImageGsUFQy.heic


원두를 분쇄한 직후부터 은은한 꽃향기가 퍼진다. 로즈힙의 향과 발효향을 머금은 자두의 달고 상큼한 향이다.


물을 부으면 좀 더 선명한 향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예쁜 꽃으로 장식한 과일바구니 같다. 다양한 꽃과 과일의 향이 어느 하나 강하게 튀지 않고 은근하게 조화를 이루며 둥글게 어우러진다.



추출을 마치고 머금은 한 모금에서 로즈힙과 재스민의 꽃향이 먼저 나타난다. 이어서 시트러스의 산미와 단맛이 있다. 낑깡을 닮은 향과 맛이다.


향과 산미에 못지않게 단맛이 강하다. 과즙이 가득 찬 잘 익은 추석에 먹는 배나 백도를 한 입 가득 베어문 것 같이 입에 침이 고인다.


조금씩 식어가면서 살구와 같은 약간의 떫은맛이 올라오며 산미가 조금 더 부각된다. 하지만 여전히 단맛이 풍성하고 후미가 깔끔하게 떨어진다. 희미하게 당도가 조금 낮은 청포도와 같은 뉘앙스도 느낄 수 있다.


중간에 비는 향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풍성하고, 불꽃놀이의 불꽃이 사라진 밤하늘처럼 순간적으로 향이 어둠 속으로 사그라든다. 라운드 한 질감, 클린컵.


복합적인 과일과 꽃향이 서로 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입과 코를 즐겁게 한다. 이래서 게이샤, 이래서 에스메랄다라고 하는 건가 보다. 지금까지 먹어본 커피 중 가장 복합적이고 가장 선명하다. 이런 커피가 다 있다.


서로 다른 향이 둥글게 어우러진다


tempImageqi3Rri.heic


서로 다른 향이 둥글게 어우러지는 커피를 마셨다. 하나하나 아름답고, 함께 할 때 환상적이다.


아내와 나도 여전히 참 다르건만,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향이 되려 여전히 서로를 둥글게 깎아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둘이 아닌 넷의 향이 될 것이다. 복합적이고, 환상적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