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추억을 닮은 맛의 커피
올 때 메로나.
커피화 로스터스의 언스페셜티 블렌드 커피다. 케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의 워시드 원두를 조합해 만든 이 원두는 이름처럼 멜론 아이스크림이 떠오르는 향과 맛이 있다. 연휴의 시작을 알리는 날에 걸맞은 신선한 느낌의 커피가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원두를 꺼낸다.
원두는 18g, 물은 92도. 적당히 굵게 갈아낸 원두를 하리오 V60에 올리고 물을 붓는다. 40초 뜸, 그 후에 천천히 점드립. 140ml의 물을 부은 후 적당한 타이밍에 드리퍼를 제거하고 뜨거운 물 100ml를 더해준다.
첫 모금에서 멜론 아이스크림의 맛과 향이 오감을 사로잡는다. 메로나를 먹을 때 느껴지는 크리미 한 멜론과 바닐라의 느낌과 캔디 특유의 단맛과 질감이 좋다. 앵두 같은 단맛과 발효향이 이어지고 목 넘김에서 과일주스를 마시는 것 같은 쥬시함이 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소중하게 한 모금 한 모금을 넘기다 보면 수박향이 후미에 나타나며 상쾌한 여름의 정취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 커피는, 어디선가 먹어본 어떤 그리운 맛을 떠올리게 된다. 메로나는 아니다. 메로나보다 훨씬 진한, 더 반짝이고 투명한 맛이다.
코코스 레스토랑의 멜론소다
어릴 적 특별한 날이면 부모님과 함께 갔던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었다. 코코스라는 이름의 패밀리 레스토랑. 벌써 3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멜론 소다. 그곳에 가면 늘 시키던 음료다. 에메랄드 녹색의 영롱한 빛 속에서 청량한 탄산이 피어올랐고, 얼음이 가득 찬 잔 위로 빙하처럼 향긋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스쿱이 고개를 내밀었다. 음식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나는 이 음료 한 잔에 그저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살 터울의 누나가 버럭 화를 냈다. 중학생이었던 누나는 눈치 없이 비싼 음료를 시키는 철없는 동생이 못마땅했다. 나의 음료 때문에, 부모님을 걱정한 누나는 늘 자신이 먹고 싶은 메뉴가 아닌 그나마 덜 비싼 메뉴를 고르곤 했다. 일찍 철이 든 누나는 정신머리 없는 초딩 막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나는 누나의 호통에 아주 조금 세상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그게 두려움이 될 줄은 몰랐다.
아이 둘을 데리고 코엑스 아쿠아리움에 갔다. 어릴 적 갔던 바로 그 코코스 레스토랑이 있던 곳에서 50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그 코엑스에, 이제는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그날의 젊었던 부모님은 일흔을 넘기셨고, 나는 어느덧 마흔의 고개를 넘었다.
첫째에게는 생애 두 번째, 둘째에게는 생애 첫 아쿠아리움이다. 첫째도 워낙 작을 때 와본 탓에 이곳의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이제는 동물 이름도 제법 알고 좋아하는 동물도 생긴 첫째에게 아쿠아리움은 도파민 터지는 신나는 놀이터였다. 두 시간을 쉬지 않고 수족관을 누비는 아이. 엄마의 손을 잡고 인어왕자와 인어공주의 수중 발레를 보며 무섭다고 눈물짓는 아이. 이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멜론 소다가 그 신비로운 색으로 빛나던 바로 그 세상을, 그 세상을 선물하기 위해 우리를 데리고 외출하던 부모님을, 그 부모님을 사랑하여 내색 않고 값싼 메뉴를 고르려 애쓰던 누나를, 그 특별한 외출이 있는 하루를, 운전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아버지의 손을 잡으시던 어머니를, 평온하고 따듯했던 우리 집을, 웃음을, 졸음에 눌리던 눈꺼풀을, 녹아들듯 이불에 파묻히던 밤을, 가슴을 토닥이던 어머니의 손길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아이가 너무 빨리 크고 있다고, 내가 너무 빨리 늙고 있다고, 세상이 이러다 순식간에 어두워져 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그게 두려움이 될 줄은 몰랐다.
연휴의 시작을 이렇게 감상적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든 게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