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담심리학 박사과정 세 번째 학기 적응기

바쁘지만 그럭저럭, 더 나아질 미래를 그리며

by 카일

진작 마쳤어야 할 입시 관련 글 연재를 1년 넘게 질질 끌게 될 줄은. 한껏 정돈된 방식으로 정보 전달에 치중한 글을 쓰다 보니, 글 하나를 올리는 데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게 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이 부담을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지만… 약간의 여유가 생겼을 때 뭐라도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소소한 근황을 전하고자 한다.






지난 학기만 해도 미국 유학을 더 이상 권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을 썼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러웠지만, 학생 비자에 대한 공격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후 어찌저찌 마음을 다시 다잡게 됐다. 다만 이민자에 대한 위협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지난 달에는 학교 근처에서 미국 이민국(ICE) 요원이 식당에서 일하던 이민자를 강제로 연행하는 일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 주 안에서 가장 리버럴하다는 이 도시에서마저 이런 일이 불거졌다는 것이 참 믿기 어렵고. 내 신분 자체가 불안정한 탓에 이에 맞서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는 현실이 나를 더더욱 무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쩌랴. 이 모든 것이 통제를 벗어난 일인 것을. 바꿀 수 없는 것들은 X같더라도 일단 수용(radical acceptance, 변증법적 행동치료의 그것 맞음)하고, 억압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지도교수를 바꾸게 됐다. 급격히 나빠진 학과 사정과 불안정한 외부 상황, 이에 따른 심적 부침이 죽 이어지던 지난 학기.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다름아닌 지도교수의 방어적 태도였다. 다행히도 우리 프로그램에서는 지도교수를 바꾸는 것이 별스럽지 않게 여겨지는 편이라,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지도교수를 바꿀 수 있었다.


수업도, 이제는 그럭저럭 적응이 되어 서울대에서 공부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소화하고 있다. 사실 어제가 윤리 수업에서 요구하는, 저널 투고를 위한 25장 분량의 영문 원고 마감일이었다. 학기 내내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데드라인 1주 전인 지난 일요일에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발등에 불 떨어진 채 하긴 하면서도 정말, 한국어도 아닌 영어로, 데이터도 없는 conceptual paper를 통째로 써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또 어영부영 데드라인에 맞게 다 써내긴 했다. 이러고 나니 앞으로 어떤 과제가 들이닥쳐도 어떻게든 해낼 것만 같은 근자감마저 샘솟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실습. 개인상담 내담자를 8명까지 늘렸고, 여기에 2시간짜리 집단상담 co-facilitating을 더했다. direct hour로만 10시간을 쌓고 있는 셈인데, 같이 실습하는 12명의 실습생 중 가장 많은 양이다. 지난해만 해도 어떻게 수업 4개와 조교 일을 하면서 내담자를 6-7명씩 만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고, 엄두도 안 났는데. 이제는 뭐 너무 당연해서 딱히 덧붙일 말도 없다. 부족한 영어 때문에 울기 일쑤였던 것도 과거의 일. 영어 실력이 대단히 나아졌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영어에 대한 끝없는 부족함을 느끼며 고통받는 데에 쓸 시간과 에너지 자체가 없는 탓에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괴발개발 떠드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진 것이다. 언어적 장벽에서 비롯된 답답함이 마음 한구석에 늘 남아 있지만, 이제는 내담자의 성장과 상담의 성과에 더 주목하게 되는 듯하다. 사례 기록도 10-15분 안에 하나씩은 써낼 수 있게 됐고, 매주 이루어지는 수퍼비전도 일종의 루틴이 되어버렸고, 내담자는 늘 새롭고, 상담은 늘 어렵지만 재밌고.


우연한 기회로 한국에서 내담자를 받아 온라인으로 개인상담을 진행하는 중인데, 이게 내 상담에 대한 reality check를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나 이렇게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 라는 재확인과 더불어 한국어로 상담한다고 해서 영어로 상담하는 것에 비해 대단히 나은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 한국어로 전하는 표현이 좀 더 유려할 뿐, 상담에서 내가 주로 시도하는 개입은 물론 상담의 전반적 모양새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고 있다. 언어와 무관하게, 한국에서 상담했던 것과 여기서 배우는 것이 상호보완적으로 쓸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연구… 를 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감을 죽 느끼고 있지만, 막상 눈에 보일 만한 성과는 따르지 않고 있다. 프로그램 자체가 연구 중심이라 보기 어렵고, 해야 할 실습의 양이 너무 많아 연구에 투입할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SSCI 학술지에 투고한 석사학위논문은 여름방학 때 한 차례 major revision을 거친 후 아직까지도 감감 무소식. 졸업 전 써야 할 article 1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 IRB를 받았음에도 미국의 소속 학교에서 한 차례 더 IRB를 받아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 상태다. 그 외의 잡다한 프로젝트 역시 투고 단계에 있거나, 투고 직전이거나, 드라이브 안에 고이 방치되어 있어서… 겨울방학 때 어떻게든, 최대한 털어낼 수 있기를 바라고만 있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남아 있다.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숙명을 이제는 좀 받아들여야 할 것 같기도. 물론 동기들은 다들 착하고, 적당한 거리감을 지키며 서로에게 잘 대해주는 편이지만… 전공 밖에서 미국인과 어울릴 기회가 사실상 전무한 데다, 거기에 쓸 시간과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 대학원생 학생회에는 의리를 지키는 마음으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고 있는데, 거기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 몇을 만나 그럭저럭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참, 이번 학기부터 미국상담심리학회의 전국 단위 학생회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2년 임기로, 다른 학교의 박사과정 학생들과 상담심리학 프로그램에 있는 학생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여러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괜히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래도 내년 컨퍼런스 때 여기서 만난 학생들과 좀 더 재밌게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좀 더 기꺼이 참여하려 마음을 다잡고 있다.


딱히 희망차지도,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도 않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로 세 번째 학기에 대한 단상을 전하게 되어 다행이다.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고, 또 쌓아가며 지내다 보면, 언젠가 원하는 만큼의 변화를 이룬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바쁘지만 그럭저럭, 종강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막간 프로모션 하나: 한국 대학원 입시 시험일과 미국 상담심리학/상담사교육 박사과정 원서 접수 마감일까지 대략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네요. 많이 늦었지만, 이 기회를 빌려 지난해 조력 서비스를 이용한 6명 전원이 한국과 미국의 상담 대학원 과정에 성공적으로 진학했다는 사실을 조심스레 전합니다. 저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다음 글을 참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추천인 요청 및 추천서 개요 작성